10일 오전 서울 중구 중림동 삼거리. 습관처럼 바닥에 시선을 두고 횡단보도를 걷는데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수묵화 혹은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묘한 이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온통 균열투성이에 패인 자국이 여기저기 널린 평범한 아스팔트 노면에 불과했다. 하지만 순간이나마 시선을 사로잡은 횡단보도 위 갤러리는 우리가 무심코 밟아 온 세월의 흔적 자체로 다가왔다.
신호에 멈춰 섰던 차량 행렬이 반짝 추위에 얼어붙은 도로 위로 또 다시 이어졌다. 육중한 타이어의 무게에 짓눌린 노면에는 늙어 가는 도시의 나이테가 자리잡고 있다. 오직‘소멸’만이 목적인 듯 매서운 풍화작용이 도시라고 없거나 약할 순 없다. 눈보라를 이기고 나면 어김 없이 찾아 오는 한 여름의 열기, 녹아 내린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실낱 같은 금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면서 단단히 뭉쳐놓은 모래 가루와 돌 조각이 아스팔트에서 파편처럼 떨어져 나갔고 실금은 점점 넓고 깊은 균열로 자리잡았다. 어디선가 굴러 온 돌 가루와 담배꽁초, 빗물이 또 다시 그 자리를 채우는 동안 계절도 여러 번 바뀌어 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도로 위를 수 놓은 온갖 표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횡단보도부터 제한 속도, 방향 지시 화살표, 지명, 과속방지턱, 차선과 주정차 금지선, 안전지대 표시 등 종류와 숫자를 셀 수조차 없다. 길 바닥은 얼마든지 재활용이 가능한 회색 도화지처럼 지워지면 칠하고 닳으면 또 덧입히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각양 각색의 노면 표시는 도시를 유지하는 약속이자 시스템의 연속을 상징하는 징표다. 때론 도시의 깔끔한 외형을 완성하는 메이크업 역할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흰색 노란색 빨간색이 입혀질수록 길 바닥 위의 나이테는 훨씬 깊고 선명해 보인다. 소멸과 생성, 변화를 반복하는 도시의 길 바닥은 오늘도 오가는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시간의 흔적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서울시, 노면표시관리에 연 93억 지출. 횡단보도 하나에 46만원들어
서울시는 노면표시 관리를 위해 연 93억 원 정도를 지출하고 있다. 노면표시 관리란 흐릿해진 표시를 덧칠하거나 신설 도로에 추가로 칠하는 것을 말한다. 시내 6개 도로사업소와 구청 25곳,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 업무를 맡고 있으며 주로 순찰을 통해 발견된 경우나 민원, 추가로 설치 구역을 우선으로 정비한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예산이 빠듯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재 도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횡단보도 하나 칠하는 데는 얼마나 들까? 시공업체의 단가표를 기준으로 4차선 도로에 설치되는 횡단보도(가로4m, 세로15m)의 경우 재료비와 노무비, 경비 등을 모두 합해 총 46만2,000 원이 든다. 글자 1자 당 드는 비용은 2만7,800원으로,“일방통행“을 칠하는데 11만1,360원이 소요된다. 직진 표시 화살표(길이 5m)는 2만7,840원, 좌·우회전 화살표(길이 6m)는 각각 3만1,320원이 든다.
노면표시 작업에 사용하는 도료는‘융착식’이다. 돌 가루나 유리알 등을 불에 녹여 끓인 특수 도료로 시공 후 5분이면 곧바로 도로를 이용할 수 있고 쉽게 깨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한 번 칠한 도색이 유지되는 기간은 차량 통행량에 따라 다르나 평균 2~3년 정도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부 기획팀=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김주빈 인턴기자(서강대 중국문화과 4) 이정현 인턴기자(국민대 사법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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