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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합조약 애초에 무효", 일본 "해방 이후에 효력 상실"

입력
2015.02.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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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식민 지배 자체가 불법" 해석 근거로 피해 보상·사과 요구

한일 협상 초기 대표 유진오 "어쨌든 무효" 정치적 타협 모색

대한민국 건국 1주년을 맞은 1949년 9월 한국 육군과 해안경비대가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로 통하는 광화문 대로에서 행진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1주년을 맞은 1949년 9월 한국 육군과 해안경비대가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로 통하는 광화문 대로에서 행진하고 있다.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관계조약)의 제2조, 이른바 ‘구(舊)조약 무효’ 조항은 한일 과거사 인식의 접점이자 분기점이다.

이 조항의 말미에 언급된 ‘이미(already)’의 의미에 대해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 일본은 “1948년 8월 한국 정부 성립 시에 효력을 상실했다”고 각기 다르게 해석하며 완전히 다른 과거사를 그려왔기 때문이다. 한국측 주장대로 1910년 한일 병합조약 등이 처음부터 무효였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자체가 위법 행위가 되어 한국은 이에 따른 사과와 피해 보상을 일본에 요구할 수 있다. 반면, 일본측 설명대로 구조약이 원래 ‘합법 정당’했다가 나중에 효력을 잃은 것이라면 일제 식민지 지배는 기정사실로서 역사에 묻히게 된다. 일본 정부가 근년 공개한 외교문서는 ‘이미’라는 모호한 단어로 과거사를 봉합한 채 오늘에 이른 한일관계의 기원과 그로부터 파생된 대한민국 정체성 문제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근거 제시 없는 “어쨌든 무효” 주장

한국과 일본이 공식적으로 첫 대면한 것은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 때였다. 과거 식민지-종주국 관계였던 양측이 각각 대한민국과 일본이라는 대등한 주권국가로서 새롭게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만난 만큼, 당연히 비정상적이었던 과거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측은 과거사 문제를 모두 불문에 부친 채 오로지 미래의 관계에 대해서만 논의하자면서 ‘우호조약’ 안을 내놨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개설된 기본관계위원회에서 “모든 구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을 담은 ‘기본조약’ 안을 제시했다. ‘무효’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 한국측 제안은 1965년 기본관계조약 제2조의 원형에 해당한다. 일본측이 무효의 의미를 따지자 한국측 유진오 대표(당시 고려대 총장)는 “중대한 질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1910년 이전의 조약은 의사에 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소급해서 무효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이 법이론을 관철했을 때 실제로는 복잡한 문제가 생기므로 법이론은 차치하고 ‘어쨌든 무효’라고 하고 싶다. (중략)이 규정에 관해서는 한국측의 주장을 노골적으로 펴는 것을 피하면서 (중략)막연하게 어쨌든 무효라고 확인하고 싶다”. 당시 한국 최고의 법학자로서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가 병합조약이 무효인 이유도 살피지 않은 채 무효만을 고집한 점이 놀랍다.

이 같은 ‘어쨌든 무효’ 주장에 대해 일본측은 “도대체 언제부터 무효라든지 등을 말하지 않으니 아주 막연하고 정치적이다” “이런 조항은 양측에 과거를 상기시키고, 적어도 일본측에는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라”고 반발했다. 이에 대해 유진오는 “오히려 파란을 진정시키는 규정”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본국 정부로부터 ‘무효’라는 글자를 반드시 넣으라는 훈령이 와있지만, 나는 (병합조약 등이)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하면 조약이 타결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논쟁이 되는 점, 예를 들면 ‘언제부터’와 같은 것도 모두 덮어두고, 어쨌든 무효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 표현이라면 일본은 일본대로 일단 설명이 되고, 한국도 다른 내용이 될 지도 모르겠으나 설명이 가능하다.” 종래의 통설처럼 박정희 정권이 ‘대일 굴욕 외교’를 전개한 결과 병합조약의 무효 시점이 모호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은 일본과의 첫 만남부터 이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정치적 타협을 모색한 것이다.

법학자로 대일 협상의 전면에 섰던 유진오 전 신민당 당수.
법학자로 대일 협상의 전면에 섰던 유진오 전 신민당 당수.

정치적 흥정으로 전락한 과거사 문제

한국측이 구조약 무효의 시점 문제 등을 ‘모두 덮어 두겠다’는 자세를 취한 만큼, 이후 일본측의 관심은 ‘무효’라는 용어를 수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그 효과를 무력화하기 위한 ‘단어 찾기’로 옮아갔다.

이때 일본측 오노 다쓰미(大野辰巳)외무성 참사관이 ‘묘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이미’라는 부사어를 덧붙인 과거사 ‘물타기’였다. 유진오는 “한국어 문장을 일본어와 약간 다르게 두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속임수이므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한일 양측은 과거사 문제의 핵심을 놓고 각자 편한 대로 해석하기 위한 정치적 흥정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문제가 한일 양국의 현안으로 다시 대두된 것은 ‘김종필-오히라 합의’로 청구권 문제가 정치적 결착을 보고 한일회담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1964년 12월부터 열린 제7차 회담에서였다. 하지만 구조약 무효를 둘러싼 이때의 논쟁은 사실상 초기 한일회담의 재판에 불과했고, 그 종착점이 바로 기본관계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였다.

왜 무효인지도 따지지 않은 채 ‘어쨌든’ 무효를 주장한 한국 정부는 병합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인 대한제국과 현재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2년 3월 12일 열린 제5차 기본관계위원회에서 일본측은 “대한제국은 국제법상 주체인 국가로서는 소멸했고 그것은 대한민국과 별개이다. 둘 사이에 계속성이 없다. 이미 사라진 국가가 체결한 조약을 무효라고 새삼스럽게 문제시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유진오는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을 계승한 것이 되지만, 이것도 덮어두고 싶다”고 답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제국의 후예”

한국이 헌법에도 등장하지 않는 대한민국과 대한제국과의 법적 동일성을 일본에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 대한제국이 일제와 체결한 조약이 무효라고 신생 대한민국이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로서의 법통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대한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에 의해 주권이 제한됐을 뿐으로 그 주권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고 말해야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이 체결한 구조약의 무효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때 유진오가 대한제국 계승론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덮어두고 싶다”고 말한 것은 대한제국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상하이 임시정부 법통설을 수용한 제헌헌법과의 불합치성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제국 법통설을 인정하는 논리적 구조 하에서는 그 국민 또한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국민이어야 했다. 국가 없는 국민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면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이전에도 그 국민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진오는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한국은 일본의 굴레를 벗어났으므로 한국인에게 덧씌워졌던 일본 국적도 그 날짜로 이미 소멸됐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모든 한국인은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일제에 의한 불법적인 식민지의 ‘굴레’가 벗겨진 결과 그 국민의 국적 또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졌다는 국적 ‘회복론’을 주장한 것이다.

日도 ‘자이니치’ 쫓아내려고 같은 논리

한국 정부의 국적 ‘회복’ 입장은 건국 직후인 1948년 12월 20일 제정된 국적법에도 그대로 표출됐다. 이 국적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일제 식민지 기간 중에 출생한 사람에 대해선 국적 규정을 아예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한국 국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더라도 별도로 국적을 확인하거나 취득 요건을 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초대 법무부장관 이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ㆍ1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우리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국가가 없었느냐 하면 국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있더라도 정부가 없는 법이 있습니다. (중략)대한민국 국민은 여전히 이전부터 시작해서 (중략)오래 전부터 정신적으로, 법률적으로 국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정부는 사라졌지만 대한제국으로부터 이어져온 국가는 소멸되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역시 국적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혈통주의에 기초한 국적의 계속성 원칙은 한일회담의 또 다른 쟁점이었던 재일한국인의 국적 문제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한국 정부의 국적 ‘회복’ 개념은 그 의도와는 정반대였지만 일본측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일본측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a)를 통해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당초 일본 국적이었던 재일한국인의 경우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해 외국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측이 재일한국인의 국적 ‘회복’을 주장한 것은 재일한국인은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므로 일본에서 강제로 퇴거시킬 수 있다는 법적 근거를 확보해 두기 위해서였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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