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불우했던 유년
한순간에 빈털터리 신세
홈리스, 싸늘한 주검으로
2008년 8월 어느 주말, 캘리포니아 선셋대로의 한 코미디극장. 휑뎅그렁한 객석을 향해 한 금발 여인이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저는 힐튼가의 오리지널 상속녀였습니다.(…) 나이를 먹었고(older), 더 현명해졌고(wiser), 영리해졌고(smarter), 염병할 더 넓어졌습니다(damn wider).” 객석의 잔잔한 웃음 위에 그는 자기 가계의 사연들을 풀어나갔다. “제 어머니는 자자 가보(ZsaZsa Gabor)예요. 그가 누군지 아시죠? 그리고 제 아버지는 콘래드 힐튼(Conrad Hilton)입니다. 여러분 중 몇몇은 그의 타월을 갖고 계실 텐데, 들키지 말고 잘 간직하세요.” 이제 패리스 힐튼(Paris Hilton) 차례. “그녀는 제 조카딸이에요. 어느날 그녀가 제게 전활 했더군요. ‘프란체스카, 나 좀 데리러 올래요? 너무 취해서 운전을 못하겠어요.’제가 말했죠. ‘얘야, 그러고 싶다만 나도 이미 취했어.’”(LA타임스, 2008.8.3)
패리스 힐튼이 프란체스카에게 저런 용건의 전화를 걸었을 리 없다. 아니 자신에게 배다른, 가난한 코미디언 고모할머니가 있다는 사실조차 어슴푸레했을 것이다. 프란체스카의 코미디는 어머니 자자 가보 이야기로 끝을 맺곤 했다. “제 엄마와 저는 가장 친한 친구예요. 이제 그녀와 나는 나이도 같아졌어요.”자자 가보가 늘 진짜 나이를 숨겼던 일을 빗댄 개그였지만, 당시 그는 의붓아버지 때문에 자자 가보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할리우드의 원년 글래머 스타 자자 가보(97)와 신화적 호텔리어 콘래드 힐튼(79년 작고) 부부의 ‘트로피 차일드(trophy child)’ 콘스턴스 프란체스카 가보 힐튼(Constance Francesca Gabor Hilton)이 1월 5일 LA의 한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숨졌다. 향년 67세. 숨질 당시 그는 홈리스였다.
백만장자 아버지와 자유분방한 은막 스타 어머니 사이에서, 또 둘의 이혼(1946년) 이후 가보를 향한 구애로 애달았던 수많은 남자들과 의붓아버지들 사이에서, 평생을 따라 다닌 황색 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프란체스카의 유년은 한편 화려했고, 한편 불우했다. 로마, 파리…, 그는 세계 각지를 원 없이 여행했고, 많은 것을 원 없이 누렸다. 그는 “엄마 남자친구들은 나를 어디든 데려가 줬고, 내 마음을 사기 위해 내가 요구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곤 했다”고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사려 깊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자자 가보에게 콘래드는 두 번째 남편이었다. 그 뒤로 그는 7명의 남편을 더 두게 된다. 어린 프란체스카는 불화와 이혼과 새로운 사랑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자유분방하고 불안정한 연애를 지켜봐야 했다. 76년 재혼(세 번째)한 콘래드 역시 자자 가보에 대한 애증 탓인지 딸의 좋은 아버지이지 못했다. 프란체스카는 힐튼가의 거대한 부와 명성, 또 전설적 스캔들 메이커 가보의 유명세를 생의 업으로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자자 가보는 영화보다 사생활로 더 유명한 배우였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가보는 연극 배우로 활동하던 19살 때 ‘미스 헝가리’에 뽑혀 영화배우가 된다. 52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 물랭 루주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마릴린 먼로(1926~1962)와 당신의 결혼은 무효입니다에 출연해 관능을 겨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영화보다 사랑에 더 몰두했던 듯하다. 영화배우 조지 샌더스, 허버트 허트너, 조슈아 코스던 주니어, 바비인형의 제작자 젝 라이언, 마이클 오헤어(76~83년) 등과의 짧은 결혼 생활. 펠리페 데 알바와는 오헤어와 이혼도 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 혼인무효가 되기도 했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미남 배우나 재력가들과의 연애도 줄잡아 수백 건. 할리우드라 해도 당시의 도덕관은 지금과 달랐고, 그는 50년대에 이미 ‘사생활이 문란한’ 배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초기 몇 편을 제외하면 좋은 배역을 얻지 못했고,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가 1971년 쓴 책 에는 당시로선 도발적이고, 심오한(?) 말들이 적잖이 담겨 있다. ‘자자 어록’으로 불리는 책의 몇몇 구절들을 보면, 방종한 여자라는 그에 대한 일반적 평가가 지나치게 인색하고 왜곡된 걸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도 된다.
-사랑 받는다는 건 강하다는 의미고, 사랑한다는 건 약하다는 의미다.(To be loved is a strength, to love is a weakness.)
-나는 그의 다이아몬드를 돌려줄 만큼 남자를 미워해본 적이 없다.(I have never hated a man enough to give his diamond back)
-남자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깊이란 데콜테(목이 깊이 파인 옷)뿐이다.(The only place men want depth in a woman is in her decolletage)
-남자와 이혼해보기 전에는 그를 절대 알 수 없다.(You never really know a man until you have divorced him.)
그는 ‘얼마나 많은 남편을 가졌냐’는 질문에 “내 남편 말인가요, 다른 여자들 남편 말인가요?”라고 대답, 자신을 경멸하는 세상을 넌지시 경멸하기도 했다. 자자 가보의 로맨스는 69세이던 1986년, 26살 연하의 프레드릭 폰 안할트와의 결혼으로 공식적으론 끝이 난다. 둘의 결혼은 당시에도, 지금도 말이 많다. “가보는 폰 안할트의 작위(독일 태생인 폰 안할트는 36세에 빌헬름 왕가 한 과부의 양자로 성인 입양돼 자신의 이름 앞에 ‘prince’를 붙이곤 했으나, 가문은 그를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를 탐냈고, 안할트는 가보의 명성과 재산을 탐냈다”고, 당시 39살이던 프란체스카는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부모의 이혼 직후인 1947년 3월 10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자자 가보는 1991년 자서전 에서 “딸은 콘래드가 나를 강간해서 낳은 아이”라고 썼는데, 사실 여부를 묻자 프란체스카는 “그 자리에 없어서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건 그들이 섹스를 했다는 사실 뿐”이라고 말했다.
성년의 그는 사진작가, 코미디언 홍보 등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71년 오손 웰스, 잭 니콜슨 등이 출연한 헨리 자그롬 감독의 영화 ‘A Safe Place’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배우로도 활동했지만 별로 주목 받지는 못한다. 부유한 부모는 각자 연애하느라 바쁘고 사업하느라 바빠 그를 사실상 나 몰라라 했다. 그는 내내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물론 콘래드가 가끔 모녀를 초대해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하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사업가였다”고 프란체스카는 말했다. 79년 콘래드는 숨지면서 당시 기준으로 2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대부분을 자신이 만든 ‘콘래드 힐튼 재단’에 기부한다. (그의 유산 중 호텔 지분을 포함한 상당액은 콘래드의 전처 소생인 차남 윌리엄 배런 힐턴(88)이 소송을 통해 상속받는다. 그가 힐턴의 현 회장이자 패리스 힐튼의 조부다. 장남 니콜슨은 69년 사망.) 콘래드가 딸 프란체스카에게 남긴 유산은 10만 달러였는데, 거기에는 ‘상속권 박탈’ 단서조항이 붙어 있었다. ‘유산 분배에 불응해 소송을 걸어 패소하면 10만 달러도 못 받는다’는 거였다. 프란체스카는 소송을 걸었고, 졌고, 단 한 푼의 유산도 받지 못했다. 그 일에 대해 훗날 그는 “과거에 안주해서 살지 말라는 게 그(콘래드)의 메시지였던 듯하다”고, 좋은 낯으로 말했다. 그는 콘래드 힐튼 재단의 임시 직원으로 취직해 일한 적도 있고, ‘힐튼’이라는 자신의 본명을 새긴 이름표를 달고 베벌리힐스 힐튼 호텔 카운터에서 투숙객을 맞는 일을 한적도 있다.
2005년 폰 안할트는 의붓딸을 사기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고소한다. 프란체스카가 엄마의 서명을 위조해 가보의 베벌리힐스 호화 맨션(시가 1,400만 달러)을 담보로 200만 달러를 대출받았다는 거였다. 프란체스카는 가보의 동의를 얻었다며 항변하는 한편 안할트를 상대로 맞소송을 건다. 주요 증인인 자자 가보가 법원에 출석하지 않고 대리 서명도 거부함에 따라 법원은 소송을 무효화한다. 당시 가보는 200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데다 반복된 수술과 복합발작 등으로 거동은 물론 의사표현 능력조차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2012년 폰 안할트는 난자를 기증 받아 대리모를 통해 그와 가보 사이의 2세를 갖기로 했다는 기괴한 기자회견을 한다. 무려 7만 달러를 들여 둘의 결혼 25주년을 자축하는 대형 전광판을 선셋대로에 내걸었고, 할리우드의 명사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연다. 물론 모든 비용은 가보의 금고에서 나왔고, 병석의 가보는 그 잔치를 즐기지 못했다.
프란체스카는 다시 소송을 건다. 폰 안할트가 엄마의 치료와 병수발을 건성으로 하면서 그의 재산을 멋대로 처분하고 있다며 법정 재산관리인을 선임해 줄 것을 요청하는 소송이었다. 그는 “현재의 남편인 폰 안할트가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막고 만날 권리마저 박탈하고 있다”고 진술서에 썼다. 폰 안할트는 “법원이 와서 아내가 얼마나 편안히 잘 있는지 보기를 바란다”며 “힐튼이 바라는 건 오직 내가 집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측은 폰 안할트가 매달 프란체스카의 변호사에게 재산 보고서를 제공하고, 매주 한 시간씩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조건에 합의했다.
프란체스카가 알뜰한 생활인이었던 같지는 않다. 배다른 사촌인 힐튼재단 이사장 스티브 힐튼의 말처럼 그가 자신의 길을 찾고자 생의 많은 부분을 바친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선의로 읽은 생부의 뜻처럼 과거로부터 벗어나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살지도 못했다. 그는 의붓아버지와의 격렬한 불화와 잇단 소송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잃었고, 정부의 생활보조금과 할리우드 지인들의 자잘한 호의로 술과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연예 전문매체인 ‘Radar Online’은 그의 말년 소식을 전하며 “한 저명 헤어드레서는 그의 머리 손질과 염색을 공짜로 해주곤 했다”고 썼다. 호텔 제왕의 딸인 그가 말년에 머문 거처는 매주 선불로 방값을 내야 하는 헐한 여인숙이었고, 그마저 낼 형편이 안 될 땐 97년식 토요타 포러너(forerunner)승용차가 그의 거처였다. 거리에 나뒹구는 신문에는 하루 걸러 패리스 힐튼의 근황들이 실리곤 했을 것이고, 그는 코미디 무대에 서서 갑부 조카딸과의 인연을 웃음의 소재로 활용했다.
힐튼이 숨진 뒤 안할트는 자살 가능성 등 죽음의 의혹을 제기하며 부검을 요구하는 한편,의붓아버지로서 프란체스카의 장례식을 주관할 권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의 오랜 친구이자 에이전트로 홍보 일을 맡아온 에드워드 로지는 “그녀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 우리 모두 안다. 사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발작이었지만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프레데릭 폰 안할트였다”고, “만약 그가 그녀의 장례식을 주관한다면 그녀는 무척 화를 낼 것”이라고 맞섰다. 검찰은 프란체스카의 부검은 승인했지만, 폰 안할트의 시신 인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숨진 지 10여 일만에 스티브 힐튼이 인수했다. 그리고 LA의 유서 깊은 웨스트우드 공동묘지에 묻혔다. 지인들의 조의금을 보태 사촌이 마련해준 장지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