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박치기에 온 국민 시름 잊고… '체육관 대통령' 선출 민주주의 시름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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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 박치기에 온 국민 시름 잊고… '체육관 대통령' 선출 민주주의 시름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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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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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개장한 장충체육관은 스포츠는 물론 정치와 예술 행사를 열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왼쪽부터 1963년 2월 1일 장충체육관 개관식, ‘박치기왕’ 김일의 프로레슬링 경기,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1967년 7월 19일 제17회 소년한국 미술대회 시상식. 한국일보 자료사진

1월 19일 서울 장충동2가 장충체육관은 배구 경기를 보려는 관중으로 가득 찼다. 한국프로배구 V리그 경기가 서울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장충체육관이 2012년 6월부터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간 이후 서울에서는 한동안 배구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공사기간에 서울 연고 팀이었던 남자배구팀 우리카드 한새와 여자배구팀 GS칼텍스 킥스는 각각 아산과 구미ㆍ평택을 임시 연고지로 삼았다. 리모델링을 마친 장충체육관이 1월 17일 개장하자마자 GS칼텍스는 원래의 연고 구장으로 돌아와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일주일 뒤인 25일 열린 배구 올스타전 역시 표가 매진돼 일부 팬들은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2월 1일에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FC의 스물한 번째 대회가 열렸다. KBS ‘남자의 자격’ 출연으로 잘 알려진 서두원 선수가 로드FC 페더급 챔피언 최무겸 선수에게 도전한 메인 이벤트를 비롯해 총 6경기가 열린 이 이벤트 역시 경기장을 팬으로 가득 채웠다. 새롭게 단장한 장충체육관이 다양한 실내 스포츠 팬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실내 스포츠의 고향

장충체육관은 한국 배구의 성지로 통한다. 1963년 2월 1일 장충체육관이 개관한 직후 열린 대회가 제2회 ‘고 박계조배 전국남녀배구대회’였다. 1970년대 배구의 인기를 끌어올린 실업연맹전과 고등학교 배구 대회 역시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 한국 남녀 배구 대표팀이 세계적인 강팀의 반열에 오르면서 1984년 실업리그가 출범하게 됐다. 1990년대를 풍미한 농구대잔치 역시 1983년 장충체육관에서 처음 열렸다. 현재 야구, 축구와 함께 한국의 4대 프로 스포츠 리그로 불리는 배구와 농구 리그는 결국 장충체육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셈이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재개관한 장충체육관은 여느 실내 경기장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시설을 갖추었다. 재개관 8일 뒤인 1월 25일 배구 올스타전을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다. 서울시 제공

하지만 장충체육관의 초창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스포츠 경기는 권투와 프로레슬링 등 격투 경기다. 196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한국프로레슬링의 슈퍼스타 장영철, 천규덕, 김일은 장충체육관에서 일본과 미국에서 온 악역 선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김일이 1967년 마크 레윈과의 경기에서 WWA 세계 타이틀을 획득한 것은 당시 한국 프로레슬링의 높은 위상을 증명한다.

1966년 김기수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장소도 장충체육관이었다.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을 2회 차지한 홍수환(65) 선수는 “장충에서 챔피언에 올랐던 김기수 선수의 퍼레이드를 보고 나도 프로복싱 선수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프로 첫 경기와 마지막 경기를 비롯해 장충체육관에서만 24경기를 치렀다. 수많은 경기 중에서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벌인 첫 번째 방어전이다. “1974년 겨울에 필리핀 선수(페르난도 카바넬라)와 경기를 했는데 당시만 해도 장충체육관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아 무척 추웠습니다. 저도 힘들었지만 상대 선수는 더 적응하기 힘들었을 테니 어느 정도는 홈 어드밴티지를 얻은 셈이겠죠.” 홍수환은 은퇴 이후로도 장정구와 김철호 등의 제자가 장충체육관에 설치된 링에 오를 때 트레이너로서 링 옆을 지켰다.

현재 한국 프로레슬링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이왕표(61) 선수는 ‘박치기왕’으로 유명한 고 김일 선수의 직계 제자다. 현재 그가 운영 중인 프로레슬링 단체 WWA는 2007년까지 장충체육관에서 대회를 열었다. 1985년 김일로부터 단체를 이어받은 이왕표는 스승의 방식을 본 따 존 호크, 자이언트 커간 등 미국 선수와 대결하며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장충체육관은 프로레슬러들에게 늘 꿈의 공간이었죠. 2007년 이후에는 그 곳에서 경기를 열지 못해 아쉽습니다.” 장충체육관에서 가장 최근 열렸던 프로레슬링 대회는 프로레슬링 선수가 아니라 MBC ‘무한도전’ 팀이 2010년에 공연한 ‘프로레슬링 WM7’이다.

권투와 프로레슬링 외에도 다양한 실내 격투 경기가 장충체육관에서 펼쳐졌다. 1983년에는 제 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열렸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유도와 태권도 종목 경기를 장충체육관에서 진행했다. 장충체육관이 모든 실내 스포츠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것은 한국 최초의 실내 경기장이자 오랫동안 서울에서 유일하게 대중 실내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잠실학생체육관과 잠실실내체육관이 완성된 후에도 장충체육관은 도심에 위치한 실내운동장으로서 스포츠와 공연 장소로 각광받았다.

▦독재 정권의 상징

모든 정치 권력은 스포츠를 이용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당연히 장충체육관에서 사랑 받은 프로레슬링과 권투를 이용했다. 박 대통령은 프로레슬링 팬을 자처했고 김기수의 권투 경기를 직접 관람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온 악역 프로레슬러와 일본 권투 선수를 물리치는 한국인 영웅들의 존재가 민심을 통제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리라는 계산이었다. 배구와 농구 역시 장충체육관에서 일본 대표팀을 초청해 여러 차례 대회를 열었다.

리모델링을 하기 이전의 옛 장충체육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충체육관은 다양한 대중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은 1960년대 현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던 서울시민회관과 함께 다수의 인원이 모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전당대회는 시민회관과 장충체육관을 오가며 열렸다. ‘근로자의 날’과 ‘수출의 날’ 기념식도 있었다. 이들 행사에 참여한 대통령은 노동자와 기업이 정부의 정책에 보조를 맞춰야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연설했다. 저임금 노동자들은 ‘산업 역군’의 지위를 얻었고 높은 수출 성과를 거둔 기업은 ‘수출유공자’가 됐다. 광복절과 5ㆍ16 ‘혁명’ 기념일에는 문화행사가 열렸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중 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을 홍보하고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장충체육관은 특히 1972년 제4공화국 헌법이 제정된 후 대통령을 선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렸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7차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의 등장으로 수세에 몰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고 의회였다. 각 지역구를 대표해 선출된 2,500명 가량의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단일 대통령 후보에 대한 찬반을 표시했다. 투표용지에 표기할 때는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써야 했다. 이는 필적을 통해 누가 반대표를 던졌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비밀선거의 원칙에 위배되는 방식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정당활동과 무관해야 했다. 자격요건 중에는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라는 모호한 조건도 포함돼 있었다. 1978년 대통령 선거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던 박승국(75) 전 국회의원은 “장래 정치 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대의원 선거에 나갔는데 정작 당선되고 나서 대의원들을 만나보니 정치적인 야망이 거의 없는 나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입후보할 때부터 4ㆍ19 세대였던 나를 배제하려고 구청과 경찰서에서 움직였다. 강력하게 항의해서 간신히 입후보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후보 대부분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승국 전 의원은 1978년 선거에서 유일하게 무효표를 던졌던 대의원이기도 하다. 그는 그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외부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어떤 방식으로 투표를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이름을 쓰는 방식으로 투표한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설마 했었던 거죠. 직접 대의원이 되고 나서는 당연히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난 무효표를 던지겠노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뜻을 같이 할 젊은 대의원들도 모았어요. 정작 투표함을 열어보니 무효는 저 혼자더군요.” 당시 집권 세력은 “통일을 앞두고 북한과 동등한 수준의 힘을 박 대통령에게 몰아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 ‘몰표’를 정당화했지만 결국 제4공화국이 북한의 일당 독재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체제임을 자인한 셈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는 대통령 선거권 외에도 헌법 개정권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달하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권한이 있었다. 유신정우회 의원 명단 역시 대통령이 제출했고 대의원들은 이 명단 전체에 대한 찬반 투표만 할 수 있었다. 삼권분립 붕괴와 독재정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 정치제도를 통해 박정희는 두번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최규하와 전두환이 차례로 ‘체육관 대통령’이 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5공화국 헌법 제정과 함께 사라졌지만 국민은 1987년이 되어서야 대통령 직접선거권을 되찾았다. 국민이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던 1987년 6월 10일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장충체육관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 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노태우는 6ㆍ29 선언을 통해 시국을 수습한 후 새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12ㆍ12 쿠데타와 5ㆍ18 광주항쟁 진압의 주범으로 단죄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다시 8년이 지나서였다.

▦장충체육관의 오늘과 내일

장충체육관은 2012년 6월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1963년 지어진 그대로 건물이 이어져온 터라 시설이 크게 낡았다. 특히 돔형 천장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리모델링은 2014년 8월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공연장 역할을 추가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면서 2015년 1월에야 마침내 새 모습을 선보일 수 있었다.

결과는 긍정적이다. 2월 1일 로드FC 대회를 관람한 홍수환은 새로운 장충체육관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특히 음향과 조명 시설이 인상적이었고 자체 대형 스크린도 설치됐다”며 “이제는 세계 어떤 곳의 실내체육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현대 스포츠는 단순히 경기를 치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기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해 주목을 끌려 노력한다. 야구나 축구에 비해 대중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배구나 비인기종목이 된 격투 스포츠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장충체육관에 갖춰졌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장충체육관이 추억의 공간이라고 해서 그 추억을 재생산하는 데만 머물러 있게 되면 결국 외면당할 것”이라며 “이제는 e-스포츠처럼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스포츠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충체육관 재개장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으려는 한국의 실내 스포츠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아프게만 들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충체육관이라는 새로운 기회의 장 위에서 새로운 매력을 선보인다면 새로운 관객이 흘러간 옛 종목에도 다시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배구와 종합격투기의 출발은 일단 합격점을 얻었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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