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가장 많이 걸던 주문은 ‘할 수 있다’였다. 달음박질하며 장애물을 뛰어넘었을 때, 농구공을 처음으로 링 안에 넣었을 때, 나는 속으로 저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할 수 있다는 주문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지만, 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실패했을 때 맛보던 쓴맛은 더욱 강렬했다. 자라면서 ‘하고 싶다’는 주문이 많아졌다. 놀이동산에 가고 싶었고 어른들처럼 늦게 잠자고 싶었다. 친구들의 꿈을 들으면 그게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는 대통령이 하고 싶다가 오늘은 문득 체조 선수를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날수록 슬퍼지는 순간도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니 앞선 두 주문이 아닌 다른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해야 한다’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까지는 이 일을, 그리고 내일은 그 다음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해야 하는 게 점점 많아질수록 ‘할 수 있다’와 ‘하고 싶다’는 작아졌다. 다 해낼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고 싶다, 해야 한다 등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 많아질수록 ‘하다’는 점점 희미해진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아진다. 정작 지금 하는 일이 갖는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집에 돌아와 잘하고 있다고, 오늘 하루도 잘 견뎠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오늘만큼은 주문하지 않고 위로를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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