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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3류 소설 사이… 논란 끊이지 않는 유명인사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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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3류 소설 사이… 논란 끊이지 않는 유명인사 회고록

입력
2015.02.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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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이 집필하는 회고록은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단서가 있다.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담아 진실하고 겸허하게 쓸 때 그렇다. 자기자랑만 잔뜩 늘어놓으면서 잘못까지 미화하려 들고 거기다 거짓까지 보태면 기록물은커녕 3류 소설이 된다. 해외에서도 이런 회고록이 심심찮게 화제다. 저자의 유명세에 논란까지 더했으니 책은 더 팔렸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쌓아온 명예에는 당연히 흠집이 난다.

바이올린 스즈키 교본으로 유명한 스즈키 신이치(鈴木鎭一ㆍ1898~1998·아래사진)는 모국어를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익혀야 한다는 이른바 스즈키 음악 교육을 주장한 전설적인 음악교사다.

스즈키 신이치.
스즈키 신이치.

스즈키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1921년부터 8년간 베를린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연주자 겸 교육자 카를 클링거로부터 바이올린을 지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클링거의 유일한 개인 지도학생이라고 까지 자신을 치켜세우는가 하면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며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경력 등 거짓 기록한 스즈키 회고록

하지만 이런 경력은 그가 죽은 지 십 수년이 지나 거짓임이 드러났다. 지난 해 11월 영국 언론은 스즈키의 학교 기록을 조사한 결과 그가 베를린 음악학교에 응시한 것은 1923년이며, 오디션 당시 “클링거에게서 사사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입학이 거부됐다고 전했다. 오디션 자료를 공개한 미국인 바이올린 주자 마크 오코너는 “스즈키는 제대로 된 바이올린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적이 없다”고까지 폭로했다. 오코너는 아인슈타인과 관계에 대해서도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인슈타인이 스즈키의 아버지가 만든 바이올린을 전달받은 일은 있지만 둘이 가깝게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며 “자신의 교육 방법을 팔아 먹기 위해 이야기를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아래사진) 전 일본 총리는 당초 발간한 회고록 내용을 훗날 부인하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나카소네는 1978년 출간한 ‘영원한 해군-다음 세대를 위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해군 중위로 복무하던 1942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에 직접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이에 대해 큰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소속된 해군 부대 군인 3,000여명 중 일부가 필리핀과 보르네오에서 도박을 일삼거나 여성을 성폭행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는 배경설명까지 곁들였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자 1997년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위안소는 지역 민간 기업들에 의해 운영됐으며 위안부는 강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지원자를 대상으로 모집한 것”으로 말을 바꿨다. 최근에는 “위안소가 아니라 병사들이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편의시설”이라고 주장했다. 나카소네의 말 바꾸기를 두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려는 일본 극우 세력들의 시도가 허튼소리를 넘어 자가당착 수준에 도달했다”고 비꼰 적도 있다.

지난해 9월 일본 궁내청이 발간한 쇼와천황실록은 쇼와(昭和) 일왕(1901~1989)의 생전 야스쿠니 신사 참배 관련 발언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실록은 1998년 4월 28일 쇼와 일왕이 도쿄의 황거(皇居) 내 후키아게교엔(吹上御苑)에서 도미타 도모히코(富田朝彦ㆍ사망) 당시 궁내청 장관을 만나 야스쿠니와 관련해 발언한 것을 니혼게이자이신문을 인용해 전하는 데 그쳤다. 2006년 7월 이 신문이 “언젠가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합사됐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마음”이라는 쇼와 일왕의 발언을 도미타의 메모에서 확인했다고 보도한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은 야스쿠니 참배와 A급 전범 등 민감한 내용을 직접 실록에 기록하기를 꺼려한 궁내청의 속내가 드러난 것이라고 꼬집었다.

●여러 대목 표절 의심 받은 부시 회고록

내용의 진위를 따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미국에서도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들이 자서전을 출간한 뒤 비난 여론에 직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위사진)은 지난해 여름 두 번째 자서전 ‘힘든 선택들’을 내놨다가 ‘상위 0.0001% 부자’논란에 휩쓸리는 곤욕을 치렀다. 자서전 홍보를 위한 ABC방송과 인터뷰에서 “백악관을 떠날 당시 변호사 비용 등 수백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고, 남편과 강연을 나가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고 말했던 게 문제였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워싱턴포스트 등이 클린턴 부부의 2012년 수입(1,670만달러)은 미국의 상위 0.0001%에 해당한다고 보도했고, 급기야 힐러리의 고액 강연료 문제로 비화했다.

조지 W 부시.
조지 W 부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11년 내놓은 자서전 ‘결정의 순간들’이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허핑턴포스트는 부시의 자서전에는 부하들의 회고록이나 다른 매체들이 사용한 표현을 자신의 생각처럼 내세운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16곳이나 있다고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취임식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을 대표적인 표절 사례로 꼽으며, 2004년 2월 ‘뉴욕서평’에 나온 구절을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리언 파네타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회고록 ‘값진 전투들’도 출간 시기와 한국 관련 일부 내용 때문에 논란이 벌어졌다. 파네타 전 장관은 이 책에서 “대통령이 우유부단한 안보 정책을 펴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며 오바마를 맹비난했다. 퇴임한 지 2년도 안된 시점에서 파네타 전 장관이 모시던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배신’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라고 평가했다.

파네타 전 장관이 2010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방한했을 때 월터 샤프 주한 미국사령관이 “북한의 공격이 있을 때 필요하다면 핵무기를 가지고 한국을 방어한다는 약속을 포함해 우리의 오랜 방위협정을 재확인했다”고 소개한 부분은, 북한에 핵 보유 명분을 줬다는 지적을 받았다. 실제로 당시 북한은 관영매체를 총동원해 핵전쟁 위협의 장본인은 미국이라고 비난했다.

● “올랑드는 위선자” 동거녀 회고록 논란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전 동거녀였던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아래사진)가 회고록 ‘이젠 감사해요’에서 올랑드가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말을 했다고 써서 논란이 일었다. 트리에르바일레는 올랑드 대통령에 대해 “그는 좌파 정치인이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힘없는 이들’이라고 (희화화해)부르고는 자신의 유머에 큰 자부심을 보였다”고 적었다. 또 “올랑드는 부자를 좋아하지 않는 척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위선자다”라고 비판했다.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

회고록 발간 후 올랑드 측근들은 “올랑드 대통령이 가난한 이들을 싫어하는 냉혹한 사람이라는 회고록 내용은 터무니없다”며 “올랑드 대통령은 약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며 적극적으로 논란 무마에 나섰다.

국내에서도 자주 이런 회고록 논란이 불거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근 낸 회고록만큼은 아니지만 지난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사실상의 회고록인 이 책에서는 김 전 회장이 외환위기 후 수출 확대를 위해 금융지원이 필요하다고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요청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강 수석이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정부가 나서서 그런 것을 못 한다”고 거부하자 김 전 회장이 “그러면 강 수석은 왜 거기 앉아 있나. 시장 중심이면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도 필요 없겠네”라고 반격해 미운 털이 박혔다고 주장했다. 이후 관료들이 “대우가 밀어내기 수출과 이로 인해 창출된 매출채권으로 운전자금을 조달하고 있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우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수출금융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거부해 대우가 해체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 전 수석은 “부실경영에다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던 게 대우그룹 해체의 결정적 원인”이라며 “당시 국제금융기관은 방만한 투자를 정리하지 않으면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는데 대우만 자구노력을 안 했다”고 반박했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원장도 2012년 발간한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김 전 회장의 인식이 틀렸다고 밝혔다. 그는 “1999년 7월까지 대우는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어서 자산 매각이든 외자 유치든 5대 그룹 중 꼴찌였다“고 주장했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k.co.kr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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