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종종 있다. 자존감을 강조했던 필자가 남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며 심술궂은 ‘저격’을 하는 것, 사려 깊은 이미지의 연애칼럼리스트가 한 때 연인이었던 이와의 잠자리를 여러 명 앞에서 술안주 삼아 자랑스레 떠드는 것, 글을 통해 본인이 유부남인 것을 강조했던 평론가가 젊은 처녀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는 것을 목격했다. 글을 보고 호감을 느꼈던 사람들이었다. 좋아했던 마음만큼 실망도 컸다.
내게 실망하는 이들도 많을 것 같다. 상대의 말에 성급하게 발끈했던 기억, 기분에 따라 달라졌던 행동, 어색함을 지우기 위한 농담과 입방정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부끄러워 이불을 차게 된다. 또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관계의 온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강조하는 글을 쓰곤 했는데,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에는 누군가의 질문이나 요청에 ‘읽씹(메시지를 읽고 씹음)’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반성하고도 나는 충동이 강하고 의지가 약한 인간이라 또 잘못을 저지를 것 같다. 다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 이렇게나 부족한 인간이 글을 쓸 자격이 있을지 고민했다.
나는 일상에서 비일상을 발견한 뒤 그것을 공유해 무언가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거나 감상하고자 ‘쓴다’. 주로 생활의 영역, 경험의 범위 안에서 어떤 강한 느낌을 주는 것과 만나는 것이 계기가 되는데, 그 느낌은 혐오일 수도, 분노일 수도, 감동일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일 때는 그런 감정을 초래한 구조적 원인에 대해 생각하며 문화적 개선이나 정책적 대안이 있을지 골몰한다. 긍정적 감정일 때는 삶을 사는데 희망의 근거를 보탤 수 있다는 생각에 감정을 느꼈던 계기를 공유한다. 완전히 체화되지 않은 깨달음이 글로 옮겨지는 이유다.
부족한 나지만,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글은 앞으로도 계속 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이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세상, 정책적 제안을 할 수 있다. 그것이 헌법이 보장한 권리이며, 사회가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사회적 부조리를 개선할 생각 대신 발화한 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검증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 대해 무언가 말하는 사람들은 부조리의 폭력을 직격으로 맞고 아파서 비명 지르는 경우가 많다. 목숨을 건 단식으로 세월호 특별법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한 아버지가 입었을 상처를 헤아려보면 숨이 막힌다. 유족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같은 일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해 진상을 낱낱이 규명해 달라 주장했을 뿐인데, 세상은 그의 사생활을 폭로하며 그가 좋은 아버지였는지를 평가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취미를 가졌는지 여부도 도마 위에 올렸다. 설사 그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고비용의 취미를 가졌다 해도 그것이 그의 사회적 요구를 멈출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어려운 현실을 경험한 뒤, 취업이 어렵고 좋은 일자리가 적은 구조적 현실을 비판했다가 취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증명하라 요구 받았고, 눈을 낮추지 않는다며 비난 받았던 적 있다. 그와 같은 자격 검증과 비난 때문에 입을 다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나빠진다고 생각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점이 글 쓰는 이가 책임을 내던지는 논리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요구를 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게 글 쓰는 이의 윤리다. 자기기만이 횡행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고, ‘자기기만.txt’가 인쇄돼 세상에 배포되는 것은 나무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쓴 대통령의 시간을 (돈 주고 사서 읽기 아까워서) 대형서점에서 훑어만 봤는데, 슬쩍 봐도 나무에게 미안했다. 자기기만과 자기정당화로 점철됐고, 의혹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는 지점에 대한 반성은 찾기 힘들었다. 독자들도 글을 읽을 때 주의해야겠다. ‘내가 실망해봐서 아는데’ 필자를 글만 보고 좋아하지 않는 편이 환멸을 줄이는 길이다. 이 글을 읽는 님들도 저에 대해 오해하는 것일 수 있다니까요…
최서윤 <(격)월간잉여> 발행ㆍ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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