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머금고 침묵을 견디는… 시극 아름다움 알릴 기회 됐으면"
김경주 시인에게 2015년은 바쁜 해다. 오래 전부터 써왔던 희곡 작품 세 편이 올 봄 연달아 책으로 나온다. 2일 출간된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에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열림원)를 시작으로, 난해한 내용 때문에 오래 연극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2인극 ‘블랙박스’, 지난해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됐던 ‘나비잠’의 출간이 예정돼 있다.
여름엔 김경주의 희곡만으로 만들어지는 전무후무한 연극제 ‘경주전’이 열린다. 4, 5명의 연출가가 시인이 쓴 희곡들로 각각 연극을 제작해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공연한다. 시와 연극의 긴밀함을 복원하는 데 10년 넘게 몸 바친 시인에게 연출가들이 바치는 뜻 모음인 셈이다.
가을에는 ‘보스턴 리뷰’의 ‘톱 오브 포엠’으로 선정된 것과 관련, 미국 5개 지역을 순회하며 독자들과 만난다. 미국의 대표 문학잡지 ‘보스턴 리뷰’는 매년 최고의 시인 20명을 선정하는 ‘톱 오브 포엠’에서 지난해 김경주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수록된 시 세 편을 꼽았다. 한국 시인으로는 처음이다.
2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한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시극(대사가 시의 형식으로 쓰인 희곡)운동’의 외로운 투사답게 “시와 극은 본래 하나”라고 말했다. “현대의 속도전이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미드(미국 드라마)’처럼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급하게 결론을 내버리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어요. 반면 시는 속도와 거리가 있는 영역이죠. 이야기를 결론 짓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시의 그런 속성은 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훨씬 본질에 가까워집니다. 말을 머금어보고 침묵을 견디는 식으로요.”
활자가 혀 위에 올라가는 순간 느껴지는 말의 능선은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리에 고무판을 끼우고 구걸하는 김씨와 연로한 파출소 직원의 대화를 그린 이 작품은, 신촌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인이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한가운데 가로 놓이고만 장애인을 보고 떠올린 이야기다.
“김씨 : (창문을 보며) 물 속에서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파출소 직원 : (담배를 꺼내 물며) 물고기들의 울음 소리야.”
이어지지 않는 듯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자주 읽는 이를 멈추게 한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아서 모든 것을 말하게 되는 속성이 시와 다를 바가 없다. “능선이 서사라면 골짜기에 고이는 건 시예요. 서사를 따라 흐르다가 골짜기를 만나면 고이면 되고 흘러가고 싶으면 흘러가면 돼요. 시극은 침묵의 질을 표현하기 위한 거니까요.”
곧 출간될 희곡집 ‘블랙박스’에서는 시와 극의 만남에 타이포그라피가 더해진다. 시인이 쓴 시극을 그래픽 디자이너 김바바씨가 활자 디자인을 통해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문학도서로는 이례적으로 디자인 책 전문 출판사 안그라픽스에서 나온다. 시인이 “(시인과 디자이너의) 공저 수준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시와 타이포그라피의 파격적인 결합을 보여줄 예정이다.
사실 ‘파격’은 시인에게 별로 달갑잖은 말이다. 시극운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실험적 시도’로만 치부되는 현실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무대에 오른 ‘나비잠’이 희곡 작가로서 처음 고료를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시극을 무대에 올리려면 여전히 제작진의 출혈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인은 9월에 떠나는 미국 낭독회도 시극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조용한 낭독회 대신 유랑 공연단을 결성해 입체적인 낭독 공연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이미 연습에 들어갔다. “특정 장르를 활성화고 싶은 게 아니에요. 시와 극을 최대한 본질에 가깝게 끌어올리고 싶은 겁니다. 시극은 이대로 가면 멸종될 거예요. 희소 장르로서 시극이 계속 살아남았으면 합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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