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다소 낡아 보이는 누런 외관의 전차가 지나는 도야마(富山)시 중심가에는 또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였습니까?”도야마현 관광과 4년 차 공무원 스기모리씨의 조심스런 질문이 이어졌다. 다카오카(高岡)시와 히미(氷見)시의 관광지와 숙소는 어땠는지,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은 만족스러웠는지 등 3박4일간 진행한 팸 투어에 대한 설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신이 숨어 있다’는 속담처럼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일본인의 특징이 지방공무원의 태도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최고’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카야마(五箇山) 산악지역의 일본전통가옥으로 모아졌다.
도라에몽처럼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
일본 중서부 호쿠리쿠(北陸) 지역에 위치한 도야마현은 동해를 기준으로 보면 경북 영덕 건너편쯤이다. 충남 절반 크기에 15개 기초자치단체, 인구 110만의 작은 현이다. 일본의 알프스로 불리는 다테야마(立山) 연봉에 둘러싸인 넓은 분지로 전통농업지역이기도 하다.
1월말, 도야마현 제2의 도시 다카오카 시내는 한 곳으로 치워놓은 눈이 군데군데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불편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 해안지방이라 기온이 0℃ 안팎으로 내린 눈이 얼지 않기 때문이다. 다카오카 중심부에는 파란 하늘색 바탕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도라에몽’ 전차가 운행한다. 이곳은 수 십 년간 전세계 어린이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만화영화 도라에몽의 원작자 후지코F. 후지오(藤子F. 不二雄, 1933~1996년)의 고향이다. 2량짜리 파란 전차가 흰색과 검정 사이 회색 톤 일색으로 칙칙해 보이는 도시 분위기를 일순간에 만화영화 세트로 바꿔놓는다.
시내에서 남쪽 난토시 고카야마(五箇山) 산악지대로 가는 길은 평지에서 조금만 벗어나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1,345편에 달하는 에피소드에서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도라에몽의 한 장면처럼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하얗게 눈꽃이 오르는 설경에 감탄사가 시작될 즈음, 버스는 오마키 온천 선착장에 일행을 부려놓았다. 쇼가와 유람선은 강과 맞닿은 산자락에 위치한 오마키 온천에 이르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쇼가와 강을 가로막은 고마키댐에서 약 25분이 걸린다. 기온은 더 내려가지 않았는데 눈송이가 초록색 호수위로 흩날린다.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던 물새도 멀리 도망가지 않고 위험하지 않을 만큼만 유람선에 자리를 내준다. 설산 위로 간간이 내비치는 햇살에 흩날리는 눈발이 만화영화처럼 얼굴에 부딪힌다. 눈꽃 속의 선상 유람이 꿈속을 미끄러지듯 비현실적이다. 선착장에서 오마키 온천까지 편도 요금은 1,400엔이다. 이 지역의 겨울 평균 적설량은 3~5m, 설경은 2월 중순까지 절정이고 3월 초순까지 볼 수 있다.
유배지에서 관광지로 변신한 고카야마 산촌지역
2차선 도로는 강 상류로 계속 이어진다. 가파른 절벽 경사면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터널이 절반이상이다. 완전히 막힌 터널이 아니라 호수 쪽은 지지대 사이로 경치가 보이는 반 터널이다. 그 위로 한 키는 넘을 듯한 눈이 쌓여있다. 낙석피해도 막고 제설작업도 필요 없는 일석이조의 경관 터널인 셈이다.
첫번째 휴게소는 600년 역사의 일본 전통종이 와시(和紙)를 만드는 마을이다. 닥나무껍질을 벗겨 삶고 찧어 묽은 죽으로 만든 다음 틀로 떠서 한 장씩 말리는 과정은 한국의 전통 한지를 만드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닥나무껍질을 눈 위에 2주간 말리는 과정에서 습기를 충분히 공급해 섬유질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만 가능한 공정이다. 와시 공예품을 파는 전시장 한 켠에 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작은 틀에 곤죽을 뜬 다음, 자연재료에 색을 입힌 풀잎과 나뭇잎으로 장식한다. 수첩크기 3장의 와시에 자신만의 장식을 더해 1,000엔을 받고 있다. 번거롭지 않으면서 소소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 수 있게 휴게소에 마련한 체험장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이곳부터 본격적으로 고카야마 산촌지역이다. 해발 300~600m 산간지역에 60여 개의 고만고만한 마을이 흩어져 있다. 화전농사에 옻나무 진을 짜고, 겨울에는 와시를 만들고, 여름에는 누에를 치는 게 이 산촌마을의 주된 경제활동이었다. 누에분뇨와 유황을 이용해 화약을 생산하기도 했다. 중세 가가한(加賀藩) 시대에는 정치범의 귀양지였다니 산촌의 궁벽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갓쇼즈쿠리(合掌) 전통가옥은 근래에 새롭게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수직에 가깝게 맞대고 있는 지붕이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맞춘 3~4층 높이 기둥과 서까래에 두껍게 억새를 얹었다. 겨울 한 철 5m에 가까운 눈도 자연스럽게 쓸려 내려 붕괴의 위험에 대비한 형태다.
가미나시(上梨) 마을의 국가지정문화재 무라카미가(村上家)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에도시대부터 전해오는 전통 춤 고키리코 공연을 볼 수 있다. 원래는 매년 4월과 9월 26일 마을 축제 때 선보이지만 요즘은 관광객을 위해 상시 공연한다. 우리의 지신밟기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액운을 막고 풍요를 기원하던 것에서 유래한 모양이다.
고키리코는 2개의 대나무 막대를 쳐서 장단을 맞추는 악기다. 북과 피리, 고키리코 연주자가 부르는 민요에 맞춰 2명의 여성과 1명의 남성 무용수가 번갈아 춤판을 벌인다. 민요는 이미 40년 전 교과서에 수록할 정도로 유명해졌고, 2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한해 방문객이 60만 명에 이른다. 공연은 30분 정도 진행되고, 20명 이상 단체관람을 기준으로 1인당 500엔을 받는다.
이 작은 마을이 유명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도야마현의 대표 술을 만드는 산쇼라쿠(三笑樂) 주조회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정문 처마에 커다란 등 모양의 원구가 매달려 있다. 삼나무 잎으로 만든 장식이다. 푸른 삼나무 잎이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술이 익어가는 정도를 외부에 알리는 표식이다. 술 담는 가정마다 달아놓아 옛날엔 누구 집에 술이 얼마만큼 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표 주조회사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술 공장은 산비탈에 2층 건물이 전부다. 규모는 작지만 내부는 5,000리터짜리 발효탱크 10여 개로 채워져 있다. 각 통마다 발효 정도가 다른 원료가 가득하다. 탱크 1개에서 2,800~3,000병의 술을 생산한다. 원액은 알코올 도수 20도지만 15도 정도로 희석해 제품으로 만든다.
술의 질은 숙성 기간이 아니라 재료에 좌우된다. 60% 도정한 쌀로 만든 다이긴조를 최고로 친다. 특히 효고현의 야마다니시키(山田錦) 쌀이 다이긴조를 만드는 최고의 원료로 우대받는다. 이곳에선 도야마와 효고에서 나는 쌀에 산에서 내려오는 자연수를 사용한다. 지하수는 광물질이 많아 부적합하다. 눈 덮인 산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맑은 물이 술을 빚기 좋은 조건이다.
6대째 내려오는 300년이 넘은 회사라는 자랑도 덧붙인다. 하기야 주석가공품을 만드는 다카오카의 노사쿠도, 창호 공예회사인 도야마의 다니하타도 몇 대째 내려오는 가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작은 실핏줄이 조그만 산골마을까지 든든히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전통과 자연이 빚은 동화 같은 마을, 아이노쿠라
최종목적지 아이노쿠라(相倉) 마을엔 어둑하게 날이 저물 녘에야 도착했다. 이 마을 20여 채의 집은 모두 전통 합장양식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단순히 보존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사람이 거주하고 민박도 운영한다. 1박2식에 1인당 12,000~15,000엔으로 비싼 편이지만 세계문화유산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매력에 예약이 힘들만큼 인기가 많다.
일행이 묵게 될 쇼우시치가(庄七家)에 도착하자, 안주인이 방 한가운데 설치된 전통 화로(이로리)에 곤들매기를 굽고 녹차를 내놓는다. 곤들매기는 송어과로 강 상류의 맑은 물에만 서식한다. 움츠렸던 몸이 조금씩 풀리면서 방안에 온기가 가득 퍼진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마을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앞 언덕까지 약 400m에 이르는 길이 온통 눈밭이다. 드디어 집집마다 발갛게 등이 켜지고 사위에는 짙푸른 어둠이 깔렸다. 지붕에서 떨어진 눈덩이는 1층을 완전히 가리고 눈밭에 2~3층만 올라온 삼각형 모양의 전통가옥들이 동화 같은 그림을 만들었다. 소담스럽게 눈송이를 인 삼나무 숲이 풍경의 방점을 찍는다. 길은 이웃마을로 이어지지만 더 이상의 풍경은 없을 듯하다.
방으로 돌아오니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화로에서 구운 곤들매기 구이와 쇼바, 송어회, 표고버섯과 고사리탕, 무 절임과 두부 등 한 눈에도 정갈하고 건강이 전해지는 밥상이다. 화로를 가운데 두고 1인상이 둥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한 상에 둘러앉아 서로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 반주를 곁들이는 우리 식사와의 차이점이다.
밤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더 없이 맑은 공기 속에 달빛이 희미한데 또 속절없이 눈이 내린다. 어떠한 소음도 철저히 차단된 깊은 산중에 그 고요함마저 눈송이에 흡수돼 떨어진다. 칠흑 같은 어둠에 비할 완전한 고요다.
화장실과 세면대는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개조했지만 다다미방은 그대로다. 방은 사면이 넓은 창문이다. 가스난로가 있지만 방안 공기에는 냉기가 감돈다. 그러나 두꺼운 요를 깔고 두 겹의 이불을 덮은 잠자리엔 온기가 가득하다. 뜨거운 물 주머니인가 했는데 목침처럼 단단하다. 아침까지도 뜨끈뜨끈하다. 마메단앙카, 일종의 휴대용 목탄난로다. 주먹보다 작은 목탄을 피워 도시락 모양의 기구에 넣고, 세 겹의 베개 닢으로 감쌌다. 목탄을 피울 수 없는 도시에선 쓸 수 없지만 시골 농가에선 겨울 필수품이란다.
밤새 내린 눈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이 지역 눈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흩날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다. 도로와 수직으로 깎은 제설면은 지층의 형성과정을 보듯 가로선이 선명하다. 고카야마 산촌마을은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오래된 미래’다.
4월을 기다리는 다테야마 연봉 눈 협곡
도라에몽의 시간여행에서 빠져 나오듯 도야마시에 도착하자 순백의 세상은 다시 잿빛 도시로 변해 있었다. 건물 색깔에 대한 특별한 규제는 없지만, 튀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의 특성이 반영된 컬러다. 도야마역 바로 앞 비즈니스 호텔 15층 식당에 들어서자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엔 한국의 조그만 소도시에도 흔해빠진 고층아파트는 없다. 이 정도면 도야마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넓게 펼쳐진 도야마 분지 지평선 부근으로 설산이 길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다테야마(立山) 연봉이다. 해발 3,000m 안팎의 고봉들이 도야마현 동남부지역을 띠처럼 둘러싼 모양새다. 흰 눈을 빼면 고봉이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분지가 넓어 산이 멀기도 하지만, 가늠하기 힘들만큼 가로로 길게 이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다테야마 산악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4월 15일에야 열리고 6월 15일까지 설산 관광을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서도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20m 높이의 눈 협곡 여행이다. 그 후 짧은 여름과 가을에 거쳐 알펜루트 트레킹도 즐길 수 있다. 고카야마 산촌을 지나며 한국에선 보기 힘든 많은 눈을 봤지만 아마도 그건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도야마=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여행메모]
●아시아나 항공이 인천공항에서 도야마 공항으로 주 3회 운항하고 있다. ●3월 14일 신칸센이 개통되면 도쿄에서 도야마까지 2시간 8분에 닿을 수 있다. 현재 JR열차로는 3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노랑풍선 여행사에서 도야마현과 인근 나가노현 주요 관광지를 묶은 3박4일 상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국내에 고카야마 산촌지역 여행상품은 없다. ●도야마현 관광 홈페이지 http://foreign.info-toyama.com/kr 에서 한국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관광신문(02-737-1122)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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