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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국제시장… 美 참전용사 영화 싸고 보수·진보 충돌

입력
2015.02.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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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역사상 가장 치명적 군인,

1998년 美 대사관 테러 보고 입대… 이라크 파병돼 160명 저격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넘다, 북미 개봉 한달만에 2억5000만달러

스크린 넘어 정치 논쟁으로, "진정한 애국자 면모 그려" "전쟁 영웅 통해 전쟁 미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미 대륙을 달구고 있다. 이라크전에 파병된 한 미군 병사의 삶을 그린 이 영화의 흥행 실적이 북미(미국과 캐나다) 시장에서만 2억5,000만달러를 넘었다. 개봉 한 달 남짓에 미국 역대 최고 흥행의 전쟁영화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2억1,600만달러)를 뛰어 넘는 새 기록을 세웠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주인공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목표로 삼은 적을 사살하기 전까지 화장실을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킬 정도로 작전에 대한 책임감과 애국심이 남다른 저격수로 묘사된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주인공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목표로 삼은 적을 사살하기 전까지 화장실을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킬 정도로 작전에 대한 책임감과 애국심이 남다른 저격수로 묘사된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심지어 미국 최대 축제인 프로 풋볼 결승전 슈퍼보울이 개최된 지난 주말에도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흥행 열기는 식지 않았다. ‘슈퍼보울 주말’에만 3,185만달러를 벌어들여 이 기간 영화 흥행 역대 최고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흥행 질주가 계속된다면 R등급(17세 미만은 부모 동반 관람) 영화 최고 흥행 기록(‘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3억7,000만달러)도 깨뜨릴 전망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22일 열리는 제87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 최우수작품상과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 후보에도 올라있다.

전쟁 영웅을 대하는 미국의 두 가지 시선

극장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열기에 휩싸인 게 아니다. 할리우드와 미국 정계까지 ‘아메리칸 스나이퍼’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전쟁 영웅을 통해 전쟁을 미화하는 영화라는 비판과 진정한 애국자의 면모를 그렸다는 상찬이 엇갈린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당파와 이념에 따라 확연히 나뉜다. 이라크전 등 테러와의 전쟁을 바라보는 미국의 진보ㆍ보수 시각이 맞선 것이 최근 3주 연속 흥행 1위의 배경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미국판 ‘국제시장’이라 할만하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에 네 차례 파병됐던 크리스 카일(1974~2013)의 동명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텍사스에서 나고 자라 로데오 선수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카일은 1998년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케냐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에서 발생한 동시 다발 테러를 보고 뒤늦게 입대를 결심한 것이다.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에서 동생뻘들과 훈련을 받은 뒤 그는 저격수로 거듭났다. 이후 카일은 이라크에 파병돼 160명을 저격하며 미군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군인이라는 평과 함께 ‘전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모델이 된 크리스 카일의 생전 모습.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모델이 된 크리스 카일의 생전 모습.

영화는 어려서부터 총을 가까이했던 보수적인 사내 카일의 전장에서의 활약과 귀환 뒤의 후유증 등을 묘사한다. 영화는 모든 분야에서 완벽했던 전쟁 영웅을 그리기 보다 참전 뒤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인간적인 모습까지 담았다. 자신처럼 전장에서 귀국한 뒤 정신장애를 겪던 전역 군인을 돕다가 살해되는 카일의 최후가 특히 그렇다. 우직하게 애국자의 길을 걸으려다 비명에 숨진 카일의 마지막 길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애도를 표하는 기록화면으로 마무리된다.

할리우드 영화는 개봉 뒤 영화의 완성도를 두고 주로 이런저런 평이 오가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놓고는 유명 인사들의 발언이 계속 더해지면서 영화평이 아니라 정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다큐멘터리영화 ‘화씨 9/11’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이라크전 개전 등을 비판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이었다.

무어ㆍ로건 비판에 “한대 맞을 것” 비난

무어는 지난달 18일 트위터에 “(적을 뒤에서 쏘는)저격수는 겁쟁이다. 우리 삼촌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에 죽임을 당했다”는 글을 올렸다. 무어는 이어 “외국 침략자에게서 자기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영웅적인 일”이라는 글을 더했다. 영화 속 카일은 올림픽 사격 메달리스트 출신인 이라크 저격수와 피 말리는 저격 대결을 벌인다. 무어의 글은 카일을 겁쟁이로, 미군에 맞서는 이라크인을 영웅으로 묘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어는 자신의 글에 대한 논란이 일자 페이스북에 자신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전쟁을 반대하지만 미군을 전적으로 응원한다는 글을 다시 올렸다.

불씨가 피어 오른 ‘아메리칸 스나이퍼’ 논쟁에 기름을 들이 부은 것은 배우 겸 감독 세스 로건이다. 그가 트위터에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속 나치 저격수가 활동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인터넷 매체가 “로건이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나치 선전영화와 연결시켰다”는 식의 선정적인 보도를 하며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유명 가수 키드 록은 무어의 페이스북에 “무어와 로건이 얼굴에 주먹 한대 맞게 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고, 또 다른 가수 블레이크 쉘턴도 트위터에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사람에게 험담하는 유명인사 나부랭이들에 신물이 난다”며 가세했다. 미시간주의 한 식당 주인은 ‘무어와 로건은 출입금지’라는 네온사인을 설치해 화제를 모았다. 로건은 지난해 말 북한의 사이버 공격을 부른 코미디영화 ‘인터뷰’를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았다.

보수 정치인들도 분개했다. 카일의 오랜 팬을 자처해온 새러 페일린 전 공화당 부통령 후보는 “당신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자유의 용사의 무덤에 침을 뱉는 할리우드 좌파들”이라며 맹비난했다. 공화당 매파인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도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험담하고 카일에 대한 추억을 깎아 내린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진보 진영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배우 겸 작가인 빌 마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사이코패스 애국자”에 대한 영화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미국의 진보학자 놈 촘스키는 “카일이 자서전에서 야만적이고 야비한 악과 싸웠다고 썼다”며 “우리 모두는 미국의 정책과 무인전투기를 통한 암살 공격에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며 눈먼 애국주의를 비판했다.

미국 진보ㆍ보수의 깊은 골 다시 드러내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싸고 번지던 논쟁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의 발언으로 다소 진정되는 분위기다. 미셸은 지난달 30일 열린 ‘인증 6’ 제도 출범 행사에서 “많은 비판이 있는 것을 알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내가 군인 가족들에게서 직접 들으면서 느낀 감정과 경험을 일깨웠다”고 밝혔다. ‘인증 6’은 전역 군인에 대한 영화나 TV프로그램을 심사한 뒤 인증 표시를 제공해 미군과 전역자에 대한 긍정적인 콘텐츠 생산을 유도하려는 제도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의 성격에 비해 지나치게 과열됐다는 평가도 따른다. 원작인 카일의 자서전이 던져준 선입견이 이런 논쟁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원작은 이번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카일의 작전 중 고민이나 전투 후유증 같은 것을 담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극단적인 피아 구도로 이라크 저항군을 절대 악으로 묘사한다. 이 자서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영화도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영화 내용은 자서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시나리오작가 제이슨 홀은 카일과 그의 부인을 만나 자서전에는 녹아 있지 않은, 카일이 전장에서 느꼈던 복잡다단한 감정을 영화에 반영했다. 결혼식을 올린 뒤 4일만에 파병된 사연, 집에 남겨진 아내의 고통, 카일이 겪었던 후유증 등이 추가된 것이다. 시나리오는 카일이 죽은 뒤 완성됐다. 골수 공화당 지지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라는 점도 논쟁을 부풀렸다. 진보 인사들은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과정을 소개하는 영화 속 역사적 배경이 이스트우드의 보수적 시각으로 묘사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일을 연기하고 제작까지 맡은 배우 브래들리 쿠퍼는 정치적 논쟁에 대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사람들이 관람할지 알 수 없다”며 “영화가 어떤 영향을 유발할지 생각하는 것 자체도 매우 건방진 행위”라고 주장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싼 진보ㆍ보수 정치 논쟁은 미국 사회도 한국 못지 않게 갈등의 골이 깊다는 것을 새삼 보여준다. 데이비드 보름위치 예일대 교수는 “부시와 (부통령)체니가 미국을 이라크전으로 끌고 간 뒤부터 공화당은 전쟁을 주도하는 당이 됐고 민주당은 전쟁에 의심을 드러내는 당이 됐다”며 “유권자들도 마찬가지”라고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앤드류 하트만 일리노이주립대 조교수는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인의 정체성은 중동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됐다”며 “‘아메리칸 스나이퍼’ 논란은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지금까지 계속된 논쟁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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