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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답’에 능한 이들을 경계한다

입력
2015.02.0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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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답’에 능한 이들을 경계하는 까닭은 우선 재미가 없어서다. 상대의 의견을 질문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의견은 언제나 답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런 습관이 몸에 밴 이들과의 대화가 열의 있게 이어진 기억이 내겐 없다. 대답이 궁해지면 대화를 예사로 우회하거나 무지른다. 답변 가능한 질문은 언제나 환영하지만 의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건 연륜이나 학식과 관련 없는 문제다. 오만과 허영, 전능의 강박이 병든 자의식의 형태로 전화한 까닭이라 나는 여긴다.

문제는 내가 그런 이들에게 끌리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고, 어떤 게 좋고 또 옳은지 혼란스러울 때 선명한 ‘대답’은 매력적이다. 직접 감당해야 할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이 신뢰할 만한 근거, 이를테면 검증된 이론이나 신망 있는 이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럴 때 대답은 나의 선택에 따른 유ㆍ무형의 책임까지 일부나마 덜어 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확신의 그 유혹적 순간이 실은 새로운 질문이 시작돼야 할 순간이었던 때가 많았다.

인류의 긴 세월을 두고 대답에 가장 능했던 이들은 신이 되었다. 신은 어떤 의문에도 응답해왔다. 신과의 대화에서 얻지 못한 답이 있다면 그건 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잘못 이해한 인간의 책임이다. ‘쿠오바디스(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같은 질문은 애당초 해서는 안될 질문이었다. 그리하여 신의 세상, 신을 추종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완성된다. 즉 의문이 봉쇄되고(서서히 잊히고) 오직 눈부신 말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길은 정해졌고,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이 요구하는 수고와 고통을 불평 없이 의문 없이 감당하는 것 뿐. 나는 그런 천국이, 옳고 그름을 떠나, 도무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 많은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실망스러웠던 이유도, 그 영화가 대답에 능한 이들의 화법을 답습하고 있어서였다. 단호한 하나의 대답이 구축해가는 영웅의 이미지. 의문을 틀어막고, 마땅히 제기돼야 할 수많은 질문들이 끼어들 틈조차 봉쇄한, 옹졸하고 오만한 화법이 거기 있었다. 2차 파병, 3차 파병… 점증하는 긴장은,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설득과 강요의 형식일 뿐이었다. 후반부에 스치듯 보여준 알카에다 저격수의 가족 신 역시, 폭탄을 들고 미군 차량을 향해 달리던 어머니와 소년의 모습을 통해 이미 질문으로서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뒤였다. 나는 그 영화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몰아가는, 너무 전형적이어서 따분하기까지 했던 대화의 방식 때문에 재미 없었다.

만일 종교의 약속처럼 천국이라는 게 있다면, 그곳은 의문으로 가득 찬 곳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대답으로 타인을 강요하지 않고, 대답을 공유하는 이들로 무리 짓지 않고, 세력을 이루지도 꿈꾸지도 않는 세상. 대답이 결론이 아니라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모든 관계-소통이라 하든 사랑이라 하든-가 수많은 의문들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세상. 궁극의 대답을 믿음으로 공유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환한 깨달음의 세상이 아니라, 내 의문을 중시하고 타인의 의문을 존중하는 세상, 회의(懷疑)의 형식으로 연대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대답’에의 본능적 끌림에 저항함으로써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일 것이다.

영화 윈터 슬립은 터키 아나톨리아의 황량한 풍경과 등장 인물들의 풍성한 대화로 채워진,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였다. 질문에 열려 있고 의문으로 소통하는 구조. 가령 극중 한 인물이 “때로는 행동보다 생각이 중요”하다고 하자, 상대는 “겁쟁이와 게으름뱅이들의 오래된 변명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아직까지 나는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모른다. 그건 영화가 대답해주지 않아서도 아니고, 내가 비겁하고 게으르기 때문이어서도 아니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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