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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묻히는 '해방 귀국선' 침몰… 日 의도적 폭침 아니었을까

입력
2015.02.0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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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즉각 송환하라" 무리한 출항 명령

폭침 원인은 여전히 베일, 귀막은 한일 정부

강제징용 한국인 수 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의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자료
강제징용 한국인 수 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의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자료

“쾅, 쾅”. 천지를 찢는듯한 잇따른 굉음이 일본이 항복을 발표하고 9일 후인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 일본 교토의 군항 마이즈루(舞鶴)를 뒤흔들었다. 막 항구에 들어서던 일본 해군의 군수물자 수송선 우키시마호(浮島丸ㆍ4,730톤)가 슬로모션처럼 솟구치는가 싶더니 두 동강 난 채 서서히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틀 전 들뜬 마음으로 이 배에 올랐던 한국인 수천 명과 가족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절규했다. 운 좋게 흩어진 갑판조각이나 기울어진 돛대에 매달렸거나 500m 가량 떨어진 육지까지 헤엄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상당수는 배와 함께 수장됐다. 1주일 후 일본 해군은 사고 경위에 대해 “조선인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미군이 투하한 기뢰를 건드려 침몰했다”고 짧게 발표했다.

의문의 출항명령 “조선인 모두 태워라”

전후 동아시아 최악의 해난 사고의 하나로 기록될 우키시마호의 침몰은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 오랫동안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공식 채널을 통해 이 문제를 일본에 제기한 적도 없었다. 유가족들은 침몰 27년 후인 1972년에야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 당국이 작성했다는 549명(13세 이하 어린이 56명 포함 한국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의 사망자 명부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어렵게 구한 일본측 자료를 참조하더라도 희생자 264명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선체 반쪽과 함께 바다 속에 있다. 수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끌려가 생고생을 하다가 결국 불귀의 객이 된지 70년이 지났지만 몇 명이, 왜 목숨을 잃었는지 등 기본적인 사실조차 베일에 싸여있다.

일본 공영방송 NHK가 1977년 8월13일 방영한 다큐멘터리 ‘폭침’에 따르면 일본 해군성은 패전 3일 후인 1945년 8월18일 느닷없이 일본 북단 아오모리(靑森)현 군항 오미나토(大湊)에 회항한 우키시마호에 “즉각 현지 조선인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와 관련 일본측 자료는 “조선인 해군 군속들이 고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호소하는 등 불온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패전 직후 제 앞가림도 버거웠던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고향에 보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군함을 움직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돌발적인 출항명령에 우키시마호의 일본 해군 병사들조차 “부산에 가면 연합군 포로가 된다”면서 항명소동을 벌일 정도였다. 당시 이 배에는 부산까지 인도할 해도(海圖)조차 없었다. 함장을 포함한 250명의 일본 승무원 가운데 아무도 부산까지 항해한 경험이 없었다. 패전 후 오미나토 경비부의 디젤엔진용 석유가 바닥나면서 우키시마호는 연료조차 보급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 당국은 군도를 찬 헌병까지 동원해 출항을 몰아붙였다.

승선자가 정원의 10배라는 증언도

일본 정부의 사고처리문서인 ‘수송함 우키시마호에 관한 자료’(1953년 12월)에 따르면 당시 우키시마호에는 노무자 2,838명과 그 가족 897명 등 총 3,735명의 한국인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측이 애초부터 탑승자 명부조차 작성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속출했다. 승선자가 최대 8,000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사와 다다오(野澤忠雄) 당시 기관장은 “무조건 태우라는 명령에 따라 마구 채워 넣었다”고 NHK에 털어놨다. 당시 일본 해군 당국은 “이 배에 승선하지 않으면 다시 조국에 돌아갈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정원이 841명인 우키시마호에는 갑판과 선실, 선창할 것 없이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NHK의 표현을 빌리면 배가 기울 정도로 많은 한국인이 탑승했다. 이들은 일제 말기 동원되어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소속으로 비행장 건설, 군항 및 방공호 보수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거나, 토목공사에 내몰렸던 한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고국으로 돌려보내준다는 소문을 듣고 바다 건너 홋카이도(北海道)의 탄광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조차 우키시마호로 몰려들었다.

징용 한국인만을 가득 태운 우키시마호는 위태로운 연료 상태를 점검하며 일본의 서해안 연안을 따라 조심조심 부산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항해 중 갑자기 인근 항구로 회항할 것을 지시 받는다. 연합군이 1945년 8월24일 오후 6시 이후 100톤 이상 대형 선박에 대한 운항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통상 속력인 12노트를 유지하더라도 부산 도착은 8월25일 오후 7시였다. 우키시마호가 돌연 기수를 돌려 마이즈루로 들어선 이유이다.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우키시마호에 오른 강제징용 한국인들.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자료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우키시마호에 오른 강제징용 한국인들.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자료

촉뢰(觸雷)설 vs 내부폭발설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이 배가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다고 주장해왔다. 우키시마호가 ‘∧’자 형태로 양단됐고 갑판이 2, 3조각으로 쪼개진 것은 수중에서 발생한 강력한 폭발이 배 밑바닥을 강타했음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체가 폭발력을 흡수했기 때문에 갑판도 산산이 부서지지 않고 크게 쪼개졌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당시 마이즈루 근해에는 미군이 설치한 다수의 기뢰가 미처리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수의 생존자와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해온 일본 시민단체는 일제의 ‘의도적 폭침’으로 침몰했다는 다양한 정황 증거를 쏟아냈다. 우선 일본 해군이 패전 직후 운항 요건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한국인 송환을 무리하게 강행한 데에는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배에는 출항 전부터 다량의 무기와 화약류가 실려 있었다. 나중에 일부 인양된 선체에서 내부 철골이 밖으로 향하고 있었고 기관실마저 파괴됐다는 것을 들어 강력한 폭발이 내부에서 발생했다고도 이야기한다. 게다가 우키시마호는 입항 전 마이즈루 군항측으로부터 소해(掃海) 작업이 완료됐다는 통보와 함께 입항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침몰 사고 후 마이즈루 해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체들이 흘러 들어왔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일단 마이즈루 해군부대가 수습해 화장한 뒤 인근 공터에 묻었는데 나중에는 가매장 부지를 추가로 물색할 정도로 시신이 몰렸다고 한다.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이렇게 수습한 시신이 153구인데, 이 중 신원이 확인된 경우는 단 1구에 불과했다.

우키시마호의 선체는 1950년 3월 및 54년 1월 두 차례 인양됐다. 일본측이 방치해왔던 선체를 뒤늦게 인양하려 한 것은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미국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대량 발주함으로써 일본 경제가 급속히 호전됐고 우키시마호 선체는 고철로 팔더라도 돈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 선체 ‘재활용’을 위해 인양에 나섰던 업체가 뒷부분만을 끌어올린 후 손을 들면서 인양 작업은 중단됐다.

한일 모두 외면한 우키시마호 폭침

‘반쪽 인양’에 그쳤지만 이때 유골들이 쏟아졌다. 침몰된 지 5년이나 지난 탓인지 온전한 유골은 하나도 없었다. 두개골 1개에 대퇴골 3개의 경우에는 2명으로 계산하는 방법으로 모두 103구가 인양됐다고 발표됐다. 이에 따라 일본측 자료는 아직도 해저의 선체 전반부에 264구의 시신이 남아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수습된 유골은 이후 일본의 관련 관청을 전전한 뒤 1971년 도쿄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됐다. 이들 유골 중 일부는 1971년과 74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봉환됐으나 아직도 280위가 ‘합골’ 상태로 이 절에 보관돼 있다.

피해 한국인들은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01년 8월 교토지방재판소는 우키시마호의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일본 정부에 안전배려 의무가 있다면서 승선 후 피해를 입은 15명에게 각각 300만엔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그러나 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은 항소심에서 완전히 뒤집히고 만다.

2001년 5월 오사카고등재판소는 우키시마호의 출항 및 운항을 국가의 ‘권력적 작용’으로 간주한다면서 1심법원의 배상금 지급결정마저 취소했다. 진상 규명을 철저히 회피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피해자들이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피해 구제조차 거부해온 일본 정부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귀를 막은 것은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한일청구권협정의 이행을 위해 1974년 12월 제정된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은 그 대상을 “1945년 8월15일까지 사망한 자의 유족”으로 제한함으로써 그 달 24일 발생한 우키시마호 사건 피해자들의 구제를 외면했다. 그 결과 ‘개인청구권’ 행사를 위해 피해자들이 일본 법정으로 달려가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한일 양국이 외면하는 가운데 ‘해방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원혼들은 70년간 이국 땅 마이즈루를 맴돌고 있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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