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짧지만 선명한 순간들은 삶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어
유명한 잠언이나 경구에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멋진 문장도 많지만, 하나마나한 말들인 경우도 적지 않다. 야구계의 유명한 명언인 요기 베라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당연한 말이잖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시작하기 전엔 시작한 게 아닌 거고….’ 깨달음 대신에 반발심만 들었다. 문득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지만 요모조모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대작가인 펄벅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일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은 잘하는 것이다. 또한 일을 잘하고 싶으면 즐겨라.” 어디서부터 시작하라는 건지, 일단 잘하라는 건지, 즐기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것인지,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즐기라는 것인지, 듣는 사람 참 난처하게 만드는 잠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잠언이 한두 개가 아니다. ‘뻔뻔한 잠언집’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낼 수 있을 정도다. ‘뻔해 보이는 잠언’의 위력은 우리가 위기에 닥쳤을 때 실감하게 된다. 일상에서는 뻔한 말이지만,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처했거나 정말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면 단어의 의미들이 달라진다. 그때에서야 삶의 관찰이 시작된다.
평소에 우리는 삶을 관찰하지 않는다. 삶의 미세한 틈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문장에는 인간에 대한 관찰이 녹아 있다. 인간과 삶에 대한 관찰과 그로 빚어진 통찰이 짧은 문장에 압축돼 있다.
삶을 관찰한다는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다. 물론 쉽지는 않다. 우선 삶과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 소설가 월터 애비시는 “글쓰기에서 제일 중요한 한가지는 다루는 소재에 대해 장난기 어린 태도를 유지하는 겁니다”라고 했지만 이 말은 생활의 관찰에서도 유용한 비법이다. 우리는 삶을 바라볼 때 너무 깊이 바라보거나 너무 얕게 바라본다. (아, 이런 문장은 정말 대가들의 하나마나한 잠언을 닮았다.) 대상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순간 객관성을 잃게 되고, 대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는 순간 감정이입이 힘들어진다. 권투 선수들이 가벼운 잽으로 상대 선수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마무시한’ 어퍼컷을 준비하는 것처럼 정확한 관찰을 하기 위해선 보이지 않는 ‘줄자’가 필요한 법이다. 영화감독이자 뮤지션이자 카투니스트이자 공연기획자인 이랑씨와 인터뷰 하면서 관찰의 경험을 여러 번 들었다.
“저는 대화와 상황을 계속 관찰해요. 언제든지 메모를 할 수 있게 손에 딱 맞는 수첩을 들고 다녀요. 두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다가 한 사람이 턱에 걸터앉기 위해서 손을 짚고 뒤로 점프하는 순간, 잠깐 대화가 끊기잖아요. 아주 짧은 순간인데, 저는 그런 순간들이 진짜 좋아요. 제가 영화에서 찍은 건데요, 친구 둘이서 절교를 해요. 둘은 지금 너무 괴롭고 힘들고, 세상에서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어요. 그런데 둘을 모두 아는 친구 대여섯 명이 지나가다가 막 손을 흔들면서 아는 체를 하니까, 이 둘도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요. 안녕, 응, 안녕, 이렇게 지나가는 순간들을 영화에 넣는 게 좋아요.”
이랑씨는 ‘미묘한 상황의 수집가’다. 수첩에는 이런 내용들이 수도 없이 적혀 있다. 미묘한 상황을 수집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을 눈치챌 줄 알아야 하고 붙들 줄 알아야 한다. 이랑씨가 겪었던 미묘한 상황은 모든 사람에게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붙들 줄 아는 사람만 상황을 꿰서 엮을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 창작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미묘한 상황을 수집해서 뭐하냐고?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미묘한 상황의 수집가’는 삶을 훨씬 즐길 수 있고,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 미묘한 상황의 수집가는 흐르는 시간 앞에 거대한 댐을 짓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시간을 흐르게 할 수 있고, 누구보다도 시간을 아껴 쓸 수 있다. 시간은 몹시 빠른 속도로 흐르고 때로는 그 속도와 압력이 우리를 초토화시키지만 미묘한 상황의 수집가들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랑씨가 자주 하는 놀이 역시 관찰과 상상에서 시작된다. 시장을 돌아다니다 가게에 적힌 낯선 이름들을 보게 됐다. ‘삥삥이’ ‘단추달이’ ‘간도메’ ‘나나인찌’ ‘큐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확인해본 결과 ‘큐큐’와 ‘나나인찌’는 단춧구멍의 종류를 뜻하는 말이었고, ‘간도메’는 바느질의 종류였다. 대부분 단추와 재봉에 관련된 일본식 용어인 듯하다.) 어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친구와 함께 상황극을 시작했다. “야, 삥삥이 다 했어? 삥삥이 다 하고 빨리 큐큐 해야 할 거 아냐.” 친구가 대답했다. “안돼, 나나인찌를 다 못해서 오늘은 큐큐는 못할 거 같아.” “아니! 나나인찌를 다 못했어? 그럼 간도메는?” 두 사람은 상황극을 하면서 신나게 웃었다. 대단한 게 아니다. 학생이었을 때 우리는 이런 사소한 놀이를 하면서 자주 웃고 떠들었지만 어느 순간 의미 없는 세계를 떠나 ‘말이 되는 세계’에서 논리적으로 살고 있다. 논리적이고 말이 되는 세계는 빈틈이 없다. 미묘한 상황을 수집하기가 쉽지 않다. 말이 되는 세계에서는 늘 말이 되는 말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랑씨가 하는 놀이는 상황을 비틀고, 단어와 의미를 비틀고,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조금만 대상을 비틀고 5도 정도만 비껴 앉으면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할 수 있는 놀이다.
이랑씨는 영화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기도 하지만 ‘신곡의 방’이라는 재미있는 행사를 만드는 기획자이기도 하다. ‘신곡의 방’은 이랑씨가 게스트 뮤지션 한 명을 초대해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새로운 노래 한 곡을 만드는 공연이다. 이랑씨가 일본에서 보고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 일본 공연자들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공연인데, 반응은 한국이 더 좋다.
“음악이 완성되는 순간의 희열이 엄청나요. 친구들 만나면 ‘시나리오는 쓰고 있어?’ ‘요즘 곡 쓴 거 있어?’ 이런 질문 자주 받는데, 다들 창작하는 걸 엄청 어려워하거든요. 집에서 혼자 만들다가 이렇게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함께 만들면 완성도가 어찌 됐건 끝냈다는 뿌듯함이 커요. 과정을 함께 지켜본 관객들은 계속 그 노래를 흥얼거리게 돼 있어요.”
이랑씨는 창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는지 몰라도 피하지 않는다. 정면 돌파하고, 만약 돌파되지 않으면 충돌로 빚어지는 파편을 즐긴다. 이랑씨가 싫어하는 사람과 일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알아봤다. 친한 친구들과 만나면 서로 좋은 이야기들만 하니까, 그런 것도 좋지만 새로운 시너지가 생기지 않으니까, 잘 맞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것 역시 이랑식 관찰의 방식이다.
“싫어하는 사람 만나면 생각의 전환이 많이 돼요. 아, 정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생각이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는데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서 싫었던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서 막 욕하면 되니까요(웃음).”
영화에 대해서 말할 때와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이랑씨는 조금 달라진다. 영화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고, 음악에 대해서는 대충 말한다.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는 자신을 ‘게으름뱅이’라고 힐난하지만 음악 작업을 하지 않는 자신을 나무라지는 않는다. 이랑 씨에게 음악은 ‘치유의 과정’이다. 잠들 수 없는 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무는 밤, 삶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밤에 이랑씨는 음악을 만든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음반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펄벅의 잠언을 다시 한번 재활용하고 싶다. “일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은 잘하는 것이다. 또한 일을 잘하고 싶으면 즐겨라.” 이랑씨의 작업에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랑씨는 자신이 작품들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보 같고 어리석지만, 엄청나게 대단하면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인 인간”에 대해서라고 했다. 이랑씨가 웃으면서 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이랑씨는 학교 다닐 때부터 관찰에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락부장이었고 선생님들의 버릇을 따라 하는 성대모사의 달인이기도 했다.
“졸업하고 나서 친구 장례식에 간 적이 있어요. 친구가 아르바이트 하다가 불이 나서 죽었는데, 거기 갔더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국어 선생님 성대모사를 해달래요. 성대모사를 했더니 애들이 막 웃다가, 또 막 울다가 계속 그랬어요. 울다가 웃다가, 또 성대모사하고….”
이랑씨가 이야기해주는 장례식장의 풍경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울다가 웃었다는, 웃다가 또 울었다는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친구들의 장례식장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멍청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함께 웃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인 사람들이다. 울다가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고, 웃다가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랑씨가 앞으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랑씨의 앨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럭키아파트’를 한번 더 듣고 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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