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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열심히 안 하면서 잘 살기로 했거든! 쉼표 한 번 찍을거야

입력
2015.01.3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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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힘들어 가장"

나만 잘하면, 나만 열심히 하면, 다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

쑥쑥 올라오는 모습을 얼핏 보면 무슨 작물인가 싶다. 한겨울을 나는 마늘 밭에 두툼하게 왕겨를 덮어 주었더니 모든 생명에 포근한 이불이 되었나 보다. 살짝 얼굴을 내민 마늘 싹(오른쪽) 옆으로 잡초가 더 크게 자리를 차지했다. 언제 뽑아야 할지 고민이다.
쑥쑥 올라오는 모습을 얼핏 보면 무슨 작물인가 싶다. 한겨울을 나는 마늘 밭에 두툼하게 왕겨를 덮어 주었더니 모든 생명에 포근한 이불이 되었나 보다. 살짝 얼굴을 내민 마늘 싹(오른쪽) 옆으로 잡초가 더 크게 자리를 차지했다. 언제 뽑아야 할지 고민이다.

“오랜만이시. 뭐 허는가.” 장씨 아저씨가 농막에 들어서면서 인사를 건네신다. “난리통이구마.” 작년 내내 미뤘던 농막 청소를 하느라 쓰레기부터 분리하고 정리하는데 난리통이란 좋은 표현이고 그냥 커다란 쓰레기통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제 좀 사람같이 살아 볼라구요. 헤헤.” 근 열흘 만에 아저씨를 보니 반가워서 나름 귀엽게 웃어 보였는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마주치니 징그러웠다. 바로 표정을 접었다. “커피 하실래요?” 말만 들으면 무슨 드립 커피라도 내놓는 것 같다.

“나라도 난리고 여기도 난리고 정신 사납네.” “나라가 왜요?” “아 그 연말 정산인지 뭔지 뉴스만 틀었다 허먼 그 얘기드만. 그게 뭐가 워떻게 됐다는 거여?” 대강 설명을 드리려는데 쓴 커피 때문인지 내내 찡그리신 표정이 풀리진 않았다.

“뭔 말인지는 알겄는디, 그거이 그렇게 정부가 납작 엎드릴 일이당가?” “아니 왜요?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는 게 당연하죠.” “말귀를 못 알아묵는구마.” 남은 커피를 원샷 하신다. “여즉까지 정부가 잘못했다고 빌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는가. 그리고 언제 한번 이렇게 빌어 본 적이 있었냐 말이시. 자네도 생각해봐. 이게 그렇게도 크게 잘못한 일이냔 말여.” 아저씨를 뚫어져라 봤지만 당췌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게 다 기자놈들 때문이여!” 갑자기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튄다. “엥? 왜요?” “기자놈들 지덜이 손해 보니께 이렇게 떠들어 대는 거 아니여?. 7천만원인가 되믄 더 많이 걷는다믄서. 갸들 받는 게 딱 그 정도 안 되는가? 그라니께 난리가 난 것처럼 나라가 시끄럽고 정부도 두 손 드는 거고. 아니여? 내 말이 틀린가?” “에이 아저씨두. 그건 좀...” “아니라고? 농사꾼덜이 기자 해 봐라. 기자가 농사를 짓던지. 농사도 금방 좋아지지!”

동네 어머니들이 창고 한 편에서 한과를 굽고 있다. 여기서 만드는 한과는 찹쌀가루나 콩가루 반죽을 숙성한 뒤 숯불에 굽기 때문에 느끼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전엔 거의 모든 집이 겨울에 한과를 만들었다는데 고된 작업 탓인지 요즘엔 찾기 힘들어 안타깝다.
동네 어머니들이 창고 한 편에서 한과를 굽고 있다. 여기서 만드는 한과는 찹쌀가루나 콩가루 반죽을 숙성한 뒤 숯불에 굽기 때문에 느끼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전엔 거의 모든 집이 겨울에 한과를 만들었다는데 고된 작업 탓인지 요즘엔 찾기 힘들어 안타깝다.

비약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럴 법도 했다. 아저씨는 그냥 좀 억울하셨던 거다. 세금 조금 더 낸다고 뭘 그렇게까지 떠드나 싶기도 하고, 정부 발표도 조삼모사같이 끓어 올랐다 식었다 하는 것도 좀 우습고. 그 반푼어치만 농촌에 신경 써도 고맙겠다는 게 말씀의 요지였다. 사람 처지가 바뀌었다고 이리도 쉽게 생각이 변하는 건지,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 말씀을 듣고 있었다.

“쫌 있으면 입춘이여...” 농막을 나서면서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이 묘했다. 어떻다는 건지, 어찌 하라는 건지. 알 듯 모를 듯, 긴가민가 헷갈렸다. “잘해야죠.” 따라나서던 내 대답도 애매했다. 아저씨는 잠깐 걸음을 멈추시더니 “잘하라는 뜻이 아니여. 뭘 어떻게 잘할라구?. 나두 잘 못하구 사는데. 그냥 그렇다는 거여.” 뭔 말씀인지 알쏭달쏭하다. “토란 씨앗 안 얼었지? 잘 나뒀다 좀 줘이” 오늘따라 아저씨가 뜬구름을 타신다. 날이 푹해서 그런가.

아침에 선재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날씨 얘기가 나왔다. 고등학생 된다고 공부 좀 해야겠다 싶었던지 마을 학원에 다니겠다는데 버스 시간이 안 맞아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으… 춥다. 어제는 봄 같았는데.” 애가 삐쩍 말라서 그런지 유독 추위를 탄다.

“그래, 오늘은 춥네. 어젠 푸근하더만.” 나처럼 살이 많아도 춥다. 피부가 살 속에 있는 건 아니니까.

“봄 냄새가 났어 아빠.” “봄이 냄새가 있어?” “있어. 약간 비리고, 약간 끈적거리고... 하튼 그런거 있어.”

봄이라는 게 무슨 실체가 있어서 냄새를 풍기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냥 ‘봄 냄새’라는 말에 마음이 녹았다. 15년을 실컷 놀더니 그런 감각이라도 남아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오랜만에 서정적인 대화를 나누니 덩달아 착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그 기분이 오래가진 못한다.

“뉴스 보니깐 개구리도 벌써 나왔대. 엄청 빠른 애들인가 봐.”

“빠른 게 좋은 걸까?”

“아빠도 나 달리기 1등 했을 때 좋아했잖아.” 말문을 막아야 했다. 머뭇거리면 지는 거다.

“걔네들 봄인 줄 알고 나왔는데 다시 추워지면 모두 죽어. 빠르다고 다 좋은 게 아녀.”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2억대 1 경쟁이래. 난 빠른거야.”

학원 앞에 도착했지만 이대로 내리게 할 순 없었다. 선재를 붙잡고 일장 훈계를 시작했다.

“너 그거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정자 숫자가 부족해서 임신이 안 된다는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애 붙들고 별 얘길 다한다 싶었지만 지난번에 샤워할 때 보니까 여물대로 여물었고 알 건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너 정자가 어떻게 여자 몸속으로 들어가는 줄은 알지?” 심각하게 물었다. 녀석이 묘한 표정으로 웃는다. “큭큭, 알아 알아.” 재밌는 얘기로 생각하나 보다. “그러면 정자 수가 아무리 부족해도 1억 마리는 될 텐데 임신이 안 되는 경우는 왜 일까? 한 마리만 들어가도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대답은 안 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필시 재미없게 진행될 것을 예감한 눈치다.

“정자가 들어가면 이를 알아챈 여자 몸에서는 이상한 놈들이 몰려오니까 철벽 수비를 펼치면서 독한 물질을 내뿜거든. 그러면 앞에 가던 놈들이 몸으로 막고 부딪쳐 가며 벽을 뚫고는 장렬히 전사해.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젤 튼튼한 놈이 다른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난자까지 도달해서 수정을 하게 되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패싸움인거지. 그래서 숫자가 부족하면 안 되는 거야.” 적절한 표현이었는지 스스로도 갸우뚱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넌 경쟁을 이겨서 태어난 게 아니라 나머지 2억 마리의 도움으로 태어난 거란 말이야. 뭔 말인지 알겠어? 경쟁이 본능이라는 건 경쟁을 시키고 싶은 놈들 얘기라구!” 듣느라고 오래 참았다고 생각했는지 “알았어 알았어. 아빠 나 내릴게.” 하더니 휑하니 사라진다. ‘저눔이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싶어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그러는 나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뭘 제대로 알고 사나? 뭘 안다고 떠들고 사나...’

이곳에 정착한 지 3년 반, 어쩌면 그 훨씬 전부터도 뭐든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뭘 하든, 어떻게 하든, 당연히 잘해야 하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도 잘해왔다고 자부했으니까. 누구보다 빨리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잘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허나 이게 모두 맞는 걸까. 뜬구름은 아닐까.

잘해왔다는, 잘하고 있다는, 잘할 거라는 것 모두 착각일지도 모른다. 구례에 오자마자 “여기 사람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잘 적응하고 있다는 칭찬으로 알았다. 듬직하게(?) 타고난 외모 덕에 도시에서의 ‘촌스러움’이 시골에서의 ‘여기스러움’으로 이어진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나름 열심히 달려왔다. 200평 딱딱한 돌땅을 괭이 하나로 갈아 보겠다고 덤비다가 팔꿈치에 병도 왔었고, 주는 대로 술 받아 먹다가 꾹꾹 눌러 왔던 통풍이 재발하기도 했다. 그렇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다 보니 스스로를 ‘모태 촌놈’으로 여길 정도가 됐다.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여기 저기서 귀농 실패 사례를 듣거나 혹은 어려움을 접할 때마다 ‘거봐라. 귀농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속으로 뻐기며 겸손을 양념으로 한 자랑을 서슴지 않았다.

힘들어 잠자리에서 끙끙거리다가도 아내가 “힘들지 않아?” 물으면 “응, 괜찮아” 대답하며 그걸로 충분하다고 혼자 생각했다. 내가 불안했던 건지, 가족은 불안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만 믿고 따라와’ 자세로 빠르게 적응하는 척, 잘할 수 있는 척하며 지내 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끌고 가야 했다. 믿음직한 가장이 되기 위해, 그렇게 보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한번은 장씨 아저씨가 그러셨다. “어이, 가장이 왜 가장인 줄 아는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서 가장이여. 아는가?” 이런 말씀까지도 그렇게 와 닿을 수 없었다.

농막 청소를 하면서도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가족은 내 뒷모습만 봐도 잘한다고 박수 쳐줄까? 나는 힘들어도 되니 가족 너희들은 만족하라고 선택을 강요한 건 아닐까? 고단함을 핑계로 짜증도 많이 냈을 텐데, 회식도 일이라며 “내가 누구 땜에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라고 소리 지르는 드라마 단골 배역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가끔은 팔짱도 끼고 안아주고 뒷걸음질치는 정도로 가도 되지 않을까. 왜 잘해야 하는 거지?

아내도 선재도 힘들었을 거다. 안쓰러웠지만 불만스러웠고, 달려가려는 사람 뒷덜미 잡는 것 같아 뭐라고 말도 제대로 못했을거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가족이 힘들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아내가 그전에도 천천히 가자고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배부른 소리로 일축해 왔다. 미안했다. 나만 잘하면, 나만 열심히 하면 다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분명 착각이었다.

가족 때문에 일하는 거라면 먼저 가족을 봐야 한다. ‘때문에’를 ‘꿈’이 아니라 ‘탓’으로 만든다면 큰 잘못이다. 가족이 손길과 시선을 요청하는데 “일거리가 산더미”라고 뿌리치는 건 앞뒤가 바뀐 일이다.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한테 흉을 들어도 되니, 가족한테만은 욕먹지 말자.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못하겠으면 도와 달라고 애걸하면 된다. 끝까지 시야에서 가족을 놓치면 안 된다.

생각이 막바지에 이르니 한숨도 쉬어지고 청소도 다 돼 가니 기운도 빠졌다. 잠깐 앉아서 물을 끓이는데 밖에서 “행니임!” 부른다. D동생이다. “있는지 어떻게 알고 전화도 안 하고 왔냐?” 인사 대신 물으니 “안 계시면 그냥 가면 되지라” 하며 웃는다.

아내가 간전댁 할머니 입술에 립글로스를 발라 드리고 있다. "루주는 발라 봤는디 요런 건 첨이네" 거울을 보시며 웃으신다. 좋아하시는 모습이 우리에겐 선물이다.
아내가 간전댁 할머니 입술에 립글로스를 발라 드리고 있다. "루주는 발라 봤는디 요런 건 첨이네" 거울을 보시며 웃으신다. 좋아하시는 모습이 우리에겐 선물이다.

“뭐 하고 계셨대요.” 앉으며 묻길래 현미차를 준비하며 마주 앉았다. “농막청소 좀 했지. 사람답게 살아 볼려고.” ‘짜슥이 깨끗해진 농막을 봤으면 칭찬도 좀 할 것이지’ 생각하는데 동생이 일어선다. “행님 제가 도와드리께라? 청소부터 다 허고 나서 쉬는 게 안 좋은가요.” 기가 막혀서 올려다봤더니 얼른 일어나라고 손짓을 한다. “야! 이거 청소한 거야. 열나게 했구만. 모르겠냐?” 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찬다. “이게 청소한 거라고요? 형님도 참, 헐라믄 제대로 좀 허씨요. 물청소도 허고 걸레질도 허고 좀. 쓰레기 쪼까 비웠다고 쓰레기통 아니다요? 잘 좀 헙시다 좀.”

동생이 돌아간 뒤 암만 생각해도 좀 억울했다. ‘네놈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뭐라고 못했다마는 형한테 그러는거 아니다. 니 형수도 나한테 안 그러는데 말이여. 그리고 얻다 대고 잘해라 마라 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주소 잘못 짚었어. 나 이제 잘 안 하면서 잘살기로 했거든! 쉼표 한번 찍을 테니까 그런 줄 알어. 너두 그렇게 앞만 보고 가다가 다치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잘해 짜샤!’ 혼자 궁시렁거린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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