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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란… 결실을 상상조차 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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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란… 결실을 상상조차 못하는 것

입력
2015.01.3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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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개봉하는 영화 ‘쎄시봉’에는 많은 사람을 의아하게 할 장면이 있다. 음악감상실 세시봉의 여신 자영(한효주)과 처음으로 단 둘이 밤을 보내게 된 근태(정우)가 멀쩡히 깨어 있는 자영 옆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다. 앞 장면에서 나온 거라곤 둘이 통영 앞 바다를 보며 충무김밥을 먹고 코니 프랜시스의 ‘웨딩 케이크’를 들은 것뿐. 짝사랑하던 여인과 데이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법한 나이인데 다소곳이 숙면을 취하다니. 김현석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았잖아요.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자버린 근태처럼요.”

짐짓 절대 그러지 않았다는 듯 웃다가 내심 뜨끔했다. 김 감독이 말한 ‘우리’ 중에 나도 포함돼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오래돼 잊고 있었던 거다. 연애라는 과목에 미취학 아동과도 같았던 열아홉 시절 저질렀던 바보 같은 일들을.

김현석 감독의 영화는 늘 그런 바보들이 주인공이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광식(김주혁)이도,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상용(최다니엘)이도, ‘쎄시봉’의 근태도.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광식이다. 김 감독의 영화도 ‘광동광’을 가장 좋아한다. 음악영화 개봉을 앞둔 김 감독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음악 사용 또한 ‘광동광’이 ‘쎄시봉’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새우깡이 400원이던 1997년 예비역 졸업반인 광식이는 신입생 윤경(이요원)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말 한 번 제대로 못 붙인다. 7년이 지난 뒤 우연히 윤경을 다시 만나지만 광식이는 연애에 있어서 여전히 미취학 아동이다. “오줌 마려울 때마다 네 생각이 나”라는 황당한 고백을 한 뒤 키스 타이밍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도망 치듯 돌아간다(이 바보를 위해 감독이 준비한 음악은 ‘나는 못난이’다).

김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를 찍으면서도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는 비관주의자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한 결말을 맞는다. 그 중에서도 광식이가 가장 불쌍하다. 짝사랑만 하다 동생 광태 친구 일웅(정경호)에게 윤경을 떠나 보내야 하는 날, 광식이가 결혼식장에 찾아가는 부분은 김현석 감독이 평생 자랑해도 좋을 명장면이다. 과거 히트곡 하나만 잘 써도 영화가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 중 김주혁이 ‘세월이 가면’을 부르는 장면

광식이가 예식장에 난데없이 등장할 때 나오는 홍콩영화 ‘영웅본색’의 음악은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뀌는 반전을 위한 포석이다. 광식이는 신랑신부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와 손을 내밀더니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뒤로 돌아선다. 김현석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은 김주혁의 소심한 듯 단호한 발걸음, 심약한 눈초리와 떨리는 손가락에서 빛을 발한다.

감독의 절묘한 선곡이 이어진다. 윤경, 일웅이와 노래방에 갔을 때 광식이가 부르려다 “방 바꿔 달랬지?”라며 불쑥 끼어든 아줌마 때문에 못 불렀던 그 노래,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기억의 습작’과 함께 2000년대 이후 한국 멜로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선곡이 아닐까 싶은 곡이다.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라는 가사만큼 광식이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대변할 노래는 흔치 않을 것이다.

1988년 발표된 ‘세월이 가면’은 ‘로보트 태권V’ 주제가와 함께 최호섭의 몇 안 되는 히트곡이다. 광식이처럼 차려 자세로 또박또박 정성스레 불러야 제 맛이 나는 노래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면 금상첨화다. 간혹 영화가 노래의 인상을 바꿔 놓곤 하는데 ‘광동광’을 보고 난 뒤엔 ‘세월이 가면’을 들을 때마다 마이크를 꼭 잡은 김주혁의 구슬픈 두 손이 떠오른다.

노래가 끝난 뒤 나오는 광식이의 짧은 내레이션은 짝사랑 ‘덕후’ 김현석 감독의 인장이다. “인연이었을까. 아닌 건 아닌 거다. 될 거라면 어떻게든 된다. 7년 넘게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녀와 이뤄질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바보짓들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게 짝사랑의 본질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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