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데이비드 에저턴 지음ㆍ정동욱 박민아 옮김 휴먼사이언스 발행ㆍ376쪽ㆍ1만8,000원

인류 역사상 말[馬]의 힘을 가장 많이 활용한 시대는 언제일까. 별 다른 운송수단이나 농기구가 없던 수천 년 전 선사시대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의외로 마력의 활용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20세기 초반이다. 1900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한 국가였던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증기기관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고도 100여 년이 더 지난 시대, 자동차와 기차가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시기에 오히려 말의 활용도가 전보다 더 높아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 같은 아이러니를 꿰뚫는 책이 나왔다. 데이비드 에저턴 런던 킹스칼리지 교수의 새 책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는 3D프린터, 우주비행, 스마트폰 등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석탄, 자전거, 콘돔, 말 등 인류가 오래 전부터 사용한 기술에 주목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기술은 늘 미래 지향적이고 시대의 변화를 이끈다’는 통념은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고 곧바로 사회가 변화하지 않으며 늘 사용해 왔던 오래된 기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말의 효용가치는 경제개발과 도시화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20세기 초에 가장 높았다. 당시 승합마차와 화물마차는 자동차, 기차보다 유용한 이동수단이었다. 휴먼사이언스 제공

예를 들어 산업화 이후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석탄은 19세기보다 오늘날 더 많이 생산되며 매년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자전거의 수는 여전히 자동차 생산량보다 월등히 많다. 1960년대 후반 판매량 정점을 찍은 콘돔은 그 후 경구 피임약의 등장에 밀려 피임도구 업계에서 사라지는 듯 했지만 에이즈가 창궐한 1980년대 재등장했다.

저자는 단순 도구나 발명품을 되짚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라 불리는 항공, 무기 분야의 어제와 오늘도 파헤친다. 2004년 마하 10(약 시속 1만1,000㎞)의 비행속도로 기네스북에 오른 X-34A는 추진로켓에 의해 3만3,000m 상공으로 옮겨진 후 약 10초간의 비행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상공 1만2,000m까지는 X-34A와 추진로켓 모두 1950년대 개발된 B-52B 전투기에 실려 운반됐다. 저자는 X-34A의 처녀비행 성공담을 “1950년대 비행기를 가지고 1960년대 조종사들보다 조금 빨리 나는 무인기를 발사한 것”이라고 요약한다. 또 1ㆍ2차 세계대전을 겪은 20세기 전쟁의 수많은 희생은 독가스, 원자폭탄 등 신무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포, 소총, 폭탄 등 재래식 무기를 개량한 기술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통념을 깨나가는 저자의 관점은 신선하지만 펼치기 전 심호흡이 필요한 책이다. 책 초반 새로운 시각에 재미를 느끼지만 2장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이후부터는 동어반복적인 병렬식 구성이 이어진다. 기술사에 큰 관심이 없다면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대단한 통찰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아예 책을 펼치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책을 통해 깨닫는 통찰은 ‘오래된 기술도 여전히 효용가치가 높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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