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만 있는 시간을, 겨울만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찬 온도에서 뜨겁게 사는 것, 그것은 두 배로 사는 삶일 것이라는 환상이 내겐 있다. 그래서 내 겨울의 도착지는 강원도 태백이다. 눈이 엄청 내리는 곳인데다 탄광지대였던 고한을 지나 큰 산을 넘어야만 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곳.
이번에 운전을 해서 태백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엄청 내리는 날 저녁이었다. 태백 시내에 들어서서 숙소를 정하려고 중심가의 작은 골목을 돌아 큰 길로 들어서는데 차가 그만 눈길 위에서 헛돌았다. 헛돌다 못해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어느 가게 쇼윈도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다행히 들이박는 사고를 피하고 차는 그 앞에서 멈춰줬다. 이제는 차를 움직여 어떻게든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도무지 차가 움직여지질 않았다. 내 차는 가로로 길을 막은 채 서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쪽에서 차 두 대가 꾸물꾸물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내 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무슨 일을 낸 사람 꼴이 됐으니 구경하거나 참견하러 몰려드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운 상황이 됐다. 그때 한 사내가 나에게 스노 타이어가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그리 부지런한 사람도 철두철미한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냥 아니라고 했다.
그 사내는 자기가 봐줄 테니 운전해 보라고 했다. 뒤로 약간, 앞으로 많이. 다시 뒤로 많이, 앞으로 약간. 사내는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후진을 할 때는 뛰어 가서 차 뒤에 섰고, 전진을 할 때는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차 앞에 섰다. 그러기를 몇 차례. 그렇게 열심히 차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차는 겨우 약간의 몸만 돌려놓고는 다시 꼼짝도 하질 않았다.
다시 사내가 연출을 바꿔 지시했다. 시키는 대로 10여 분 동안 사투와 곡예를 했더니 차가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후진으로 골목을 빠져 나와야 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서히 차가 움직이자 이번에는 사내가 차의 속도에 맞춰 30여㎙를 따라와 줬다.
이 와중에도 내가 잠시 괴로웠던 것은 이 사람의 선의에 대한 의문이었다. 참 이상한 것이면서, 동시에 다행이다 싶은 상황에서도 나는 ‘이 사람은 왜 이토록 나를 도와주고 있지?’ ‘이 사람은 과연 내가 무사히 이 골목을 빠져나가기만을 바라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까지 하느라 땀범벅이 된 채 의문의 힘으로 핸들을 돌려야 했다. ‘아무리 내가 이 지경이라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미쳐서야 후진해 나오던 끝에 삼거리를 만났고 그곳에서 나는 사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씩씩하게 남기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몇 배는 됐을 나 스스로의 어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겠으나 그렇다고 다르게 감사 표시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숙소를 구하고 나서 눈 내리는 저녁 길을 산책할 겸 밖으로 나왔다. 시장도 가고 서점에도 들르고 황지 연못에도 들른 다음 다시 그 사고의 현장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좋은 냄새가 나는 어느 식당 안 창가 자리에 그 사내가 다른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라는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참 많이도 반가웠던 나머지, 나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옆자리에 앉아 술 한 잔을 따라줄 뻔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틈에 끼고 싶었지만 그들의 술자리 분위기는 그것만으로 그윽했으며 보기에 좋았다. 뭔지 모를 아찔한 기분과 함께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워 눈길에서 ‘성냥을 파는 소년’처럼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그 사내를 대신해 내가 슬쩍 술값을 치르면 어떨까 고민도 했지만 내가 값을 치르는 사이 그가 나를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애초 내 마음과는 다른 상황에 이를 것이니 그만두자 하고서는 내처 길을 갔다.
그때였다. 얼마쯤 길을 가고 있었을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잠시만요.”
나는 고개를 돌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술집에 있던 그가 뛰쳐나와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청을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몸을 돌려 나를 부르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거, 장갑 흘리고 가셨는데요.”
눈길에서 내가 흘린 장갑 한 짝을 주워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는 처음 보는 태백 사람이었다.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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