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색의 향기] 인문학 공동체에서의 ‘갑질’

입력
2015.01.29 20:00
0 0

새벽이나 한밤중에 전화를 받으면 많이 놀라는 편이다. 어제 밤, 새벽 3시가 지나 받은 전화도 그랬다. 자다가 깨어나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공동체 공부 모임에 참여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다. 상대는 의외로 느긋했다. 같은 공부 모임 총무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입니까?”

화난 목소리를 내며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별것 아닌 일로 새벽이 가까운 한밤중에 전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전화로 떠올린 평소 그의 무례, 또는 ‘갑질’ 때문이었다. 이메일 하단에 자신의 직업을 또렷하게 박아놓은 그는 잘 나가는 전문직이었다. 그래서인가, 공동체에 공부하러 왔다가 청소며 복사 같은 잡무를 자진해서 돕는 청년들을 아랫것 대하듯 했다. ‘갑질’을 하는 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게도 비슷했다. 반말도 예사로 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인문학을 공부하며 고전을 읽느냐’며 쫓아버리고 싶은 것도 여러 차례였다. 뒤늦게 자신의 무례를 알아챘는지 이튿날 아침, 그가 사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화를 내며 전화를 받은 나도 미안해 긴 답장을 보냈다. 이제 그는 ‘갑질’을 하는 고객에서, 명실상부한 공동체 공부 모임의 일원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인문학 공동체에도 ‘갑질’을 하는 이가 없지 않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바뀐다. 공동체의 주축은 역시 젊은 연구자, 직장인, 주부지만 내로라 하는 인사들도 많이 찾아온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학자도, 예술가도 여럿이다. 이들은 굳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10명 남짓한 공부 모임에 대학 교수가 3명이나 되는 경우도 생긴다. 가르치러 왔다가 배우는 이도 있고, 배우러 왔다가 발목을 잡혀 가르치는 이도 있다. 한때 제법 큰 병원의 원장이 3명이나 되는 모임도, 재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나자마자 이곳을 찾은 이가 2명이나 되는 반도 있었다.

대부분 우연찮게 이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됐지만, 한 대기업 CEO는 이곳을 찾기도 전에 알았다. 비서실에서 강좌에 대해 문의해온 탓이다. 나는 해당 강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가 오는 것은 만류했다. 이곳은 유명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이나 이른바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와 다르다, 공부를 좋아하는 이들이 격의 없이 어울리는 가난한 공동체다, 대기업 CEO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이 직접 쓴 메일을 보내왔다. 자연인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거였다. 다짐대로 그는 30대 여성 총무의 말에 순응하고, 88만원 ‘미생’ 들과 어울리며 열심히 공부했다. 혹시, 공동체에 ‘갑질’을 하는 이가 드문 것은 이런 분들 덕분인가.

새벽 전화를 받은 뒤, 곧 시작하는 올해 사진반 모집 공지를 다시 썼다. 사진반 선생님이 보내온 당초의 공지는 사진에 집중된 것으로, 다소 심각했다. 대학의 사진교실을 포함한 주류 사진 교습소의 소비적인 사진 행위에 대한 비판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쓴 글은 값 비싼 카메라, 그럴듯한 출사지, 고도의 테크닉만 따지는 사진에 대한 날카로운 평문이기도 했다. 스스로 빼어난 사진가이자, 고집스러운 예술가, 비평가답게 사진에 대한 바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을 모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사진 욕심이 커 보였다.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내가 새롭게 쓴 공지는 편안한 것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사진을 즐기시라. 강의를 들으며 토론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뒤풀이를 하고, 정기 출사나 번개 출사를 하다 보면 사진 못지않게 좋아지는 동료 회원들과의 유대를 즐기시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 사진반에서 사진 공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곳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의 나눔이다, 우정이다. 이는 사진이나 드로잉, 건축, 영화 같은 공동체의 문화예술 프로그램뿐 아니라 인문학 공부 모임도 비슷하다. 그래도 아는가, 이렇게 사람과 어울려 즐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예술혼이나 공부에 대한 열정이 타오를지. 인문학 공동체에서도 인문학이나 문화 예술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