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수화로만 대화하는
동유럽 장애학생들 충격적 이야기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대상 받아
영화 ‘트라이브’에는 대사가 한 마디도 없다. 음악도 없다. 스피커에선 입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이나 물건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달그락, 바스락, 또각또각, 우당탕탕, 퍽퍽, 철컥, 윽, 헙…. 말 한마디 없지만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깝게 들린다. 영화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건 입이 아니라 손이다. 청각ㆍ언어 장애인 학생들이 다니는 기숙학교가 배경이기에 등장인물들은 말 대신 수화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관객을 위한 자막이나 해설은 어디에도 없다. “무성영화에 대한 경의를 담은 작품”이라고 밝힌 감독은 “사랑과 증오에 대한 이야기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다고 했다.
‘트라이브’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청각장애인 학교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전학생이 주인공인 학원물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비추면서 영화는 어두운 본색을 드러낸다. 거대한 범죄집단을 방불케 하는 교내 조직은 강도와 매춘을 일삼으며 학생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전학하자 마자 괴롭힘을 당하다 조직에 합류한 세르게이는 폭력과 착취의 세계에 적응하며 포주 역할을 하던 중 조직 두목의 여자친구인 안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세르게이가 안나의 매춘을 막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인물들의 손과 얼굴 근육도 바빠진다. 카메라는 장면을 분할하지 않고 오래 찍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묵묵히 따라간다. 말하는 인물이 필요할 땐 멀찌감치 뒤로 빠져 대사의 개입을 막는다. 10대들이 주인공인 영화지만 표현 수위가 만만치 않다. 잔인한 폭력, 무표정한 섹스, 끔찍한 낙태 장면 등이 여과 없이 화면을 채운다.
차가운 동유럽의 암울한 공기를 담은 이 영화는 단순하고 명징한 감정의 충돌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대사나 자막, 해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관객은 인물들의 손짓과 표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처음엔 모호해 보이던 감정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점이 오히려 영화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관객이 수화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될 무렵 영화는 뼛속까지 시릴 만큼 송연한 결말에 도달한다.
‘트라이브’는 우크라이나 출신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청각장애인 특수학교 맞은 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경험과 청각장애인 모임의 대표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고 한다. 영화에 출연한 청각장애인 배우들은 대부분 연기 경험이 전무한 ‘거리의 아이들’로 주로 SNS와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다. 독창적인 형식미를 선보인 이 영화는 지난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대상을 수상했다. 29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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