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남과 북이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시 난관이 조성됐다. 먼저 미국 오마바 대통령이 소니 픽처스 해킹사건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하고 추가 행정제재 조치를 취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한미합동군사연습의 임시중지를 4차 핵실험과 연계하자고 미국에 제안하고, 이를 남북대화의 또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남측이 설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추진하자는 제안에 대해선 5·24 조치 해제를 전제조건으로 걸고 나왔다.
북한이 대북전단 살포중지 요구에 이어 대화의 새로운 전제조건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정부 당국자는 과연 “북한이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화의 전제조건이 늘어나자 우리 정부는 북한의 대화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한은 올해 신년사에서 강조한 “남북관계의 대전환, 대변혁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일 ‘평화적 환경’과 ‘대화분위기’ 마련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5일에는 국방위원회 정책국 성명을 통해 이를 거역할 경우 “단호한 징벌을 면치 못한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남북 모두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남측은 전제조건 없는 대화 재개를 요구하는 데 비해, 북측은 말에 대한 실천행동을 강조하면서 대화를 위한 ‘분위기와 환경’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남측은 북이 추가적인 전제조건들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볼 때 대화의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북측은 지속적인 대북전단 살포를 보고 남측의 대화의지를 의심하는 것 같다. 남북관계의 장기 단절에 따른 상호 불신이 커져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 정권은 결국 붕괴될 것”이란 가정 아래 지금은 대화보다 제재와 압력, 그리고 인터넷으로 북한의 변화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미국이 추진하는 ‘전략적 인내’가 하드파워인 군사력의 직접 사용을 피하고, 소프트파워를 동원해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면서 기다리는 전략이란 점을 오바마 대통령이 너무나 솔직히 밝혔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그들과의 “전면대결전에서 궁지에 몰린 패자의 가련한 넋두리에 불과하다”고 받아넘겼지만 정보유입 차단을 위한 내부 단속을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핵실험과 연계한 북한의 군사연습 중단 요구를 ‘암묵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일축했다. 한마디로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해결을 모색하기 보다는 ‘평화적 이행전략’과 전략적 인내로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폐기와 관련한 진정성 있는 행동이 전제되지 않는 한 협상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기존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한편에선 탈북자 단체와 미국의 인권재단 관계자가 대북전단을 띄우고, 다른 한편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 강경발언을 쏟아냄으로써 남북관계 복원을 희망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더욱 어려워졌다. 올해 들어 박근혜 정부는 선핵폐기론의 고리를 풀고,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 발전의 선순환’을 밝히면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서 비핵화를 촉진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변화 움직임에 북한이 화답하기는커녕 전제조건을 늘리고, 미국이 전략적 인내를 지속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대화재개를 어렵게 하고 있다.
대화에 전제조건이 붙으면 상대에게 굴복하고 나오란 의미가 내포돼 있어 들어주기가 쉽지 않다. 한미군사연습 중단과 5ㆍ24조치 해제 등 추가된 전제조건들은 회담의 의제로 다룰 문제다. 하지만 대북 전단문제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서방세계와 이슬람원리주의세력의 충돌이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문명충돌’이듯이, 비방중상 중지 합의와 표현의 자유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면 남북관계 복원과 민족문제 해결이란 국민 다수의 ‘일반의지’ 차원에서 전단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북한 정권과 체제를 부정하는 대북전단을 보내면서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모순이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탈북자 한 두 명이 그들 마음대로 남북관계를 좌우해도 어쩔 수 없다면 신뢰를 가지고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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