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살기 위해 기생의 길
대찬 그녀의 삶은 종종 현대 문학의 소재로 등장
재상집 아들 이생과 함께 떠난 금강산 유랑은 히피의 삶과 비슷
거문고와 노래 실력도 출중, 남긴 시조들 또한 애틋한 정념에 그치지 않고
성숙한 사랑의 본질 노래, 감정을 우주의 질서로 끌어올려

황진이가 기생이 된 것은 핏줄에 의해서도 아니고 몸이 팔려서도 아니다. 그녀는 자기 의지에 따라 스스로 기생이 되었다. 조선 중엽의 황진이가 현대의 한국문학을 매혹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태준이 1930년대에 소설 ‘황진이’를 쓴 이후 정한숙, 박종화, 정비석, 안수길, 최인호가 황진이에게 길고 짧은 소설을 바쳤으며, 북쪽의 홍석중, 남쪽의 전경린, 김탁환이 또한 자기 시대의 틀을 깨뜨리고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만큼 용맹했던 정신과 굳세었던 힘을 한 기녀에게서 찾아내려 했다. 그렇다고 옛사람들이라고 해서 황진이를 가볍게 본 것은 아니었다. 옛사람들도 그 시대의 틀을 뒤흔든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황진이의 행적을 전하려 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허균의 ‘성소부부고’가 모두 황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은 작게 여길 일이 아니다.
특히 유몽인의 ‘어우야담’ 중 ‘진이’ 편은 열녀전을 쓰는 것 같은 단정한 문체와 어진 선비의 품행을 전하는 것 같은 진지한 태도로 이 분방했던 여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황진이가 화담 선생을 찾아가 글을 배운 일화는 짧지만, 재상집 아들 이생을 움직여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내력은 길다. 남자는 베옷에 삿갓을 쓰고 양식을 짊어졌으며, 여자는 머리에 송낙을 쓰고 갈포 저고리와 베치마를 입었다. 그들은 금강산의 기장 깊숙한 곳까지 찾아들어갔다. 황진이는 몸을 팔아서 노자를 보탰고 이생은 경우에 따라 하인 행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승려를 승려로, 유생을 유생으로 상대하며 그렇게 반년을 보낸 후에 헤진 옷에 검게 탄 얼굴을 내밀고 그들은 다시 대처로 돌아왔다. 그들의 행적은 우리 시대에 극단적인 자유를 확보하려 했던 히피의 삶과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있다.
선전관 이사종과의 관계는 목가적이라면 목가적이고 현대적이라면 현대적이다. 두 사람은 송도의 한 시냇가에서 노래를 인연으로 만났다. 그들은 6년을 기한으로 계약결혼 비슷한 방식의 동거를 했다. 처음 3년 동안은 황진이가 생활비를 마련하여 이사종을 섬기고 그 집안을 돌보았다. 다음 3년은 거꾸로 이사종이 황진이와 그 집안 돌보기를 제가 받은 것과 똑같이 했다. 약속한 기일이 다 되자 황진이는 하직하고 떠났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가 평양감사에서 파직된 임제의 이야기도 적었다. 그러나 황진이의 시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유몽인이 보기에 황진이는 시를 젖혀놓고 그 행적만 가지고도 붓을 들어 후세에 전해야 할 사람이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황진이가 이생을 이끌고 감행한 여행은 금강산 답사로 끝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짚신을 신고 죽장을 짚은 발걸음은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거쳐 전라도 나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 남행길의 황진이는 홀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황진이의 생애에서 가장 매혹적인 일화는 이 나주를 무대로 삼고 있다. 황진이가 나주에 당도했을 때는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한참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풍악이 높고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그때 그때 필요한 경비를 벌어서 여행해야 하는 황진이도 그 잔치판에 끼어들었다. 준비된 의상이나 용모를 가다듬을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녀는 해진진 옷에 때 묻은 얼굴로 그 자리에 끼어 앉아서도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는 제 차례가 오자, 적삼 속에 손을 넣어 태연히 이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거문고를 무릎에 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뭇 기생들이 기가 죽었다고 썼지만, 기가 죽은 것은 기생들뿐만이 아니라 양반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이 전문가의 긍지와 위엄이다. 이 긍지와 위엄으로 황진이는 자유로울 수 있었으리라.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여 그에게서 글을 배운 사연은 30년 면벽했던 지족 선사를 파계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와 늘 짝을 이룬다. 그녀가 제 의무에 엄격한 학자 한 사람을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에게서 깊은 사랑을 얻어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가 화담의 띳집에 찾아갈 때는 늘 거문고와 술을 지녔다고 했다. 그녀가 화담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시간은 엄격했던 한 학문의 도야가 도달하게 될 이상세계의 삶을 예행하는 시간과 같았을 것이고, 관념의 나무에 현실의 물을 주는 시간과 같았을 것이다. 그녀가 쓴 시들이 또한 그러하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이 시조에서, 사랑의 시간이 짧음을 한탄하는 한 여인의 애틋한 정념만을 보려 한다면 부당한 일이다. 황진이는 오히려 사랑이 어떻게 성숙하고 어떻게 진정한 성질을 얻게 되는지 말하고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은 물론 임이 없이 홀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다. “춘풍 이불 아래”도 임이 없는 잠자리다. 임은 언제 올지 모른다.
겨울의 긴 밤과 따뜻함이 준비되는 봄밤은 사실 같은 밤이다. 똑같이 임이 없다는 점에서만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터전이라는 그 본질에서 같다. 긴 겨울밤은 부족함으로 가득한, 하나가 부족하기에 모든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삭막한 공간일 뿐이다. 황진이가 베어내는 것은, 다시 말해서 제 마음 속에 새겨 넣는 것은 이 결여의 감정이다. “춘풍 이불 아래”는 그 결여에 의해 상처 입은 마음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이 결여의 감정으로 제 몸을 그어 본 사람만이 자기처럼 고독으로 상처 입었던 사람을 이해하며, 그 결여와 고독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낼 힘을 누린다. 임을 곧바로 영접하여, 동짓달의 긴 밤에서 베어냈던 시간의 한 고비를 곧바로 펴지 못하는 것은, 저 결여의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즉 사랑으로 바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시간을 체험했던 사람은 자기 안에 자기만을 위해 마련된 빈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곳이 한 사람의 말라붙은 마음을 소생시키는 유일한 장소이다. 황진이는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바로 그 유일한 장소로 가져간다. “춘풍 이불 아래”가 여전히 고독한 장소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고독한 마음은 벌써 자신의 상처로 다른 상처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비한다.
“어론님”에 관해서는, 그것이 ‘어루만진 임’ 다시 말해서 ‘이미 정분을 나눈 임’이라거나 ‘몸이 얼어 있는 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단지 임에 대한 경칭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미 정분을 나눈 임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오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는 속된 해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몸이 얼어 있는 임’이라는 해석에는 극적인 성격이 있지만, 임을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마뜩지 않다.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임에게라도 어찌 없을 것인가. 내가 사랑으로 따뜻해졌다면 임도 사랑으로 따뜻해졌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고, 그래서 마침내 한 사람을 어른으로 만드는 어떤 특별한 힘이다.
황진이에게는 ‘영반월(詠半月)’이라는 한시가 있다.
誰斷崑山玉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
裁成織女梳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牽牛離別後 견우를 떠나보낸 뒤에
愁擲碧空虛 시름하며 푸른 허공에 던져두었네
시는 하늘의 반달이 원래 곤륜산의 옥으로 빚은 직녀의 빗이라고 말한다. 직녀는 견우와 이별한 후 그 빗이 부질없는 것이라 여겨 푸른 허공에 내던져 두었다. 반달이 직녀의 빗이라는 생각은 직녀의 전설에 본디 없는 것으로 황진이의 창안이다. 황진이는 자신이 창안한 것을 전설 속의 사랑에 바쳐 그 전설을 완성하고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자신의 사랑을 전설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한 여자의 감정 한 조각이 우주 창조의 설계를 변화시킨 셈이다. 그것은 황진이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라면 누구의 사랑이건 마땅히 대단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다. 황진이는 자신의 기개를 헛되이 쓰지 않았다. 대찬 기운을 지녔던 그녀는 자신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기녀가 되는 길을 선택했으며, 자신이 확보한 자유를 바탕으로 인간의 사랑에 오직 전설의 사랑만이 누릴 수 있는 품위를 얻어주었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