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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오기 전에 그가 있었다

입력
2015.01.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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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국내 최초로 활동

돌탑 등 동양적 정서 담아낸 작품

2만 점 중 1000여 점 선별 전시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물 기울기 퍼포먼스'. 작가가 기울인 모니터의 기울기만큼 화면의 물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물 기울기 퍼포먼스'. 작가가 기울인 모니터의 기울기만큼 화면의 물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국내 비디오아트 선구자 박현기의 생애를 총망라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관장 직무대리 윤남순)의 ‘박현기 1942-2000 만다라’전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잇는 토종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회고전이다. 백남준이 1984년에야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데 반해 박현기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자비를 털어 국내에는 생소한 비디오아트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백남준보다 10년 아래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나, 코스모폴리탄적인 백남준과 달리 선 사상 같은 동양적 정서를 훨씬 깊게 작품에 투영했다.

1978년 7월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 출품한 돌탑 시리즈 '무제'. 실제 돌 사이에 유리로 만든 가짜 돌을 끼워 넣었다.
1978년 7월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 출품한 돌탑 시리즈 '무제'. 실제 돌 사이에 유리로 만든 가짜 돌을 끼워 넣었다.

한국전 때 피난지에서 돌탑을 쌓는 사람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박현기는 돌과 물을 단골 소재로 썼다.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한 초기 대표작 ‘비디오 돌탑’은 실제 돌 사이에 돌의 영상을 담은 모니터를 끼워 넣어 실재와 가상의 모호한 경계를 표현했다. 1983년에는 수많은 돌로 전시장을 채우고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의 소리를 채집해 확성기로 재생하며 헤드셋을 쓴 돌이 그 소리를 듣게 했다. 이번 전시장에서 그야말로 널브러져 있는 돌 무더기를 맞닥뜨려도 놀랄 일은 아니다.

1997년작 만다라 시리즈. 얼핏 보면 완벽한 기하학적 도상으로 보이지만 여러 포르노 사진이 빠르게 흘러가도록 합성했다.
1997년작 만다라 시리즈. 얼핏 보면 완벽한 기하학적 도상으로 보이지만 여러 포르노 사진이 빠르게 흘러가도록 합성했다.

벽면의 스크린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이미지가 압도적인 ‘폭포’나 하얀 대리석 위에 잔잔한 물결 영상을 비추는 ‘현현(顯現)’은 90년대 말 작가가 선보인 명상적인 작품인데 관객과 선문답을 하는 듯 하다.

전성기 때 완성한 ‘만다라’ 역시 성(聖)과 속(俗) 모호한 경계를 가리킨다. 우주의 진리와 깨달음을 형상화한 원형의 불화(佛畵)인 만다라에 작가는 부처와 산스크리스트 문자 이미지 그리고 무수한 포르노 사진이 빠르게 흘러가도록 편집한 영상을 넣어 성과 속이 혼재한 한 편의 만화경을 만들어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실체와 허상,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자연과 인공, 전통과 문명 등 대립되는 것들의 긴장이 만드는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한 작가”라고 설명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와 건축을 공부하고 1970년대 초 대구로 낙향한 그는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번 돈을 모니터와 카메라를 사는 등 작품 활동에 쏟아 부으며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 주요 작가로 참가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여러 차례 국제 비엔날레에 출품하고 1980년대에 일본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1990년대에 분 국내 비디오아트 열풍으로 이름을 날리며 ‘우울한 식탁’ ‘만다라’ ‘낙수’ 같은 대표작들을 쏟아내던 그는 2000년 58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갑작스레 별세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2년 유족이 기증한 아카이브 2만여 점을 2년 간 정리한 끝에 1,000여 점을 선별해 이번 전시를 열었다. 메모광이었던 고인은 1965년 학창 시절부터 2000년 임종 직전의 스케치까지 35년간 작품 구상을 담은 메모와 각종 활동 자료를 거의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왜 그동안 박현기를 재조명하기 위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작품이 전시된 원형전시실은 3300㎡(약 1,000평)에 달하는데 가운데 섹션에 메모 등 자료들을 도서관에서 책 뽑아보듯 한데 모아 연대기별로 정리해 놓고 바깥쪽을 빙 둘러가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작가의 대표작 ‘만다라’처럼 경계를 넘어 하나로 이어진 전시는 국내 첫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의 거의 모든 것을 재현하고 있다. 5월 25일까지. (02)2188-6000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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