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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세금, 기꺼이 토해 내겠다. 다만

입력
2015.01.2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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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한사코 5,000원을 여덟 살짜리 내 아들 손에 쥐여줬다. 이틀간 엄동설한에 박스를 주워 번 돈이다. 자신에게 2,000원짜리 뻥튀기과자를 선물한 녀석이 기특하다며. 그리고 또박또박 낮게 말했다. “젊은이들 덕분에 나 같은 늙은이가 살지, 고마워요.”

작년 크리스마스에 우리 가족은 홀로 사는 노인을 찾았다. 쌀과 잡곡 삼계탕 세탁세제 비타민 등 생필품을 선물하고, 캐럴을 불러준 뒤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눴다. 슬하에 자녀가 많지만 다들 살기 팍팍해서 자신을 못 챙겨준다는 사연, 그래도 국가 지원(기초노령연금)이 늘어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는 얘기까지 마친 뒤, 할머니는 “다 여러분이 내준 거잖아요”라고 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2013년 크리스마스에 만난 할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신체장애가 있는 40대 아들과 사는 할머니는 “우리 같은 사람한테 나랏돈(세금)을 쓰게 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다. ‘알량한 물질을 주러 갔다가 도리어 귀한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에 아내는 울먹였고, 나는 웃었다. 아들은 엄마를 달랬다.

별 고민 없이, 크리스마스를 때우려고, 아내의 제안으로, 나 자신을 위해, 마지못해 2년 전부터 시작한 일이 연거푸 깨달음을 줬다. 내가 낸 세금이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인다는 평소엔 잊고 있던 사실 말이다. 작년 연말정산에 50만원 가까이(전년 환급액 60만원을 감안하면 100만원 넘게) 토해내면서 분을 삭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모자(母子)의 고백 덕분이다.

연말정산 파동을 겪으면서 두 할머니를 떠올린다. 우리가 낸 세금이 없다면 그 조그만 보금자리마저 위협받을, 지원금을 받을 때마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고개 숙일 그들은 이번 파동을 알고 있을까. 행여 자신들의 잘못이라 여길까 봐 걱정이 앞선다.

이번 사태는 이제 ‘번 만큼 더 낸다’는 조세원칙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배려 평등 양보 신뢰 납세의무 같은 공동체의 가치마저 훼손시키고 있다. 똑똑한 머리로 꼼수를 일삼는 정부의 기만과 정치공방에 매몰된 국회의 몰염치가 공생하면 이 나라를, 더불어 사는 우리 사회를,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개인을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어떻게 이기주의로 치닫게 하는지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이 내팽개쳐지는 작금의 현실이 난 올해 더 토해낼 세금보다 더욱 아깝다. 세액공제가 소득재분배 차원에서 소득공제 방식보다 낫다는 상식을 앞으로 어떻게 납득시킬 것이며, 소급 적용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또 어떻게 풀 것인가. 능력이 되는데도 성난 민심에 편승해 잇속을 챙기는 부자들의 조세 저항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급한 불도 제대로 끄지 못하는 상황에서 올해 반드시 추진하겠다는 4대 구조개혁 구호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잇따르는 유아 폭행 사건 역시 정부의 무능과 공동체의 가치 상실을 드러낸다. 맞벌이로 아이 맡기느라 애를 먹어본 나는 그저 ‘집에 있는’이라고 일각에서 표현한 전업주부들이 공짜라고 아이들을 맡긴 것도, 그에 따른 수요 증가로 자격이 떨어지는 보육교사들을 양산한 것도 사건의 근본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가사 노동은 그 어떤 노동보다 고귀하고 벅차다. 전업주부 역시 직접 아이를 키우고 싶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월 112만원의 박봉에, 하루 10시간 가까이 일하는 보육교사들의 고된 처지를 평소 헤아린 적이 있는가. 물론 자기방어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폭행한 건 이유불문하고 무겁게 단죄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잘못된 정책 설계와 주먹구구 평가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정부가 무능하고 믿음이 안 간다면 중산층(연봉은 미치지 못하지만 나도 마음은 중산층이다)인 우리라도 똑똑하게 공동체의 가치를 세워야 한다. 우리가 낸 세금은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데우기도 한다.

나는 이번에도 세금을 기꺼이 토해낼 준비가 돼있다. 세금액수만큼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된다고 믿겠다. 그러니 정부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거짓말을 사과하고, 증세를 증세라고 실토하라. 4대강 해외자원개발 같은 삽질에 절대 내 돈을 허투루 쓰지 마라.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 보육교사들에게 써달라. 그게 납세자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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