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기 쉬운 몸집 작은 종, 마을 굿·제사 공양물의 중심에
일제시대 거치며 개량종 확산… 1986년부터 복원사업 꾸준히
흑돼지라는 정식 명칭보다 ‘똥돼지’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제주흑돼지는 기원전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제주 유적지 곳곳에서 초기 철기시대(BC 200년경) 유물과 함께 돼지뼈가 발굴되는 등 토착민들에게 돼지는 오래 전부터 친숙한 동물이었다. 발굴된 돼지뼈를 토대로 고대 제주흑돼지의 모습을 유추해보면 현재 토종흑돼지처럼 몸집이 작은 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주 지역과 한반도 일대에서 서식하던 재래돼지 중 비교적 운반이 수월한 소형종이 남해를 건너 제주로 전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제주흑돼지에 대한 첫 문헌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285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제주의 옛 명칭)가 있는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와 돼지를 기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제주로 건너온 흑돼지가 고대 시절부터 사육돼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해동역사’에 “탐라는 개와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기록이 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제주 지역에 말, 소, 돼지를 키우는 장소가 표시돼 있다. 제주흑돼지는 제주의 돌담과 만나 더욱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알려진 대로 제주에서는 오래 전부터 돌담을 둘러 터를 잡고 통시(변소)에 돼지를 함께 길렀는데 이 시설을 ‘돗통(돼지우리)’이라고 부른다. 돗통은 배설물과 음식물 쓰레기 처리, 퇴비 생산이라는 생태순환적 원리가 반영된 제주 특유의 시설로 발전했고, 이를 통해 제주흑돼지는 ‘똥돼지’라는 별칭도 얻게 됐다. 전통적으로 제주도에서 돼지는 식용가축 그 이상이다. 지금도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에 통돼지를 올리고 잔치나 장례에 돼지고기가 빠지는 법이 없다. ‘돗수애’(돼지순대) ‘돔베고기’(돼지수육) ‘돗새끼회’(암퇘지 자궁 속의 새끼돼지로 만든 회) 등 다양한 음식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향토문화 깊숙이 자리잡았다. 제주 출신으로 2003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제주 민속 조사에 참여했던 강권영 제주 해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제주도에서 돼지는 생업과 신앙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토양이 척박해 농사 짓기 힘든 화산섬 제주에서 농사의 일등 공신은 ‘돗거름’이라 부르는 돼지거름이었다. 물이 귀해 논은 없고 밭농사로 보리와 조를 주로 재배했는데, 통시에서 키운 돼지 분뇨와 인분, 지푸라기를 섞은 돗거름을 썼다. 통시 하나에서 나오는 돼지 분뇨는 인분 500인분과 맞먹는다. 이걸로 보리 농사를 지었다. 돗거름 양으로 한 집안의 농사 규모를 가늠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제주 서쪽 지역에서는 마당에 돗거름을 널어 몇 개월 숙성시키고 소를 데려와 짓이긴 것에 파종해서 밭에 뿌렸다. 바람이 세서 발아가 힘든 제주 환경에서 그렇게 뿌린 보리씨앗은 거름더미에서 싹을 틔워 쑥쑥 자랐다. 제주 동쪽 지역에서는 보리 씨 따로, 거름 따로 쓰기도 했다.
1만 8,000위의 신이 있다는 신들의 섬, 제주의 무속신앙에서도 돼지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제주의 마을신당인 본향당은 부부 신이 많은데, 부부라도 고기 먹는 신과 쌀 먹는 신으로 식성이 서로 달라 그 갈등 때문에 육식신은 위에, 미식신은 아래에 따로 좌정하곤 한다. 이는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가는 과정의 갈등을 보여준다.
마을굿이나 집안굿에서도 공양물의 핵심은 돼지다. 구좌읍 김녕마을의 괴네기굴에는 ‘괴네기또’라는 신을 모시며 마을 제의를 지내던 괴네기당이 있다. 괴네기당에서 나온 동물뼈의 90%가 돼지뼈다. 구좌읍에서는 지금도 돼지를 통으로 바치는 집안굿 ‘돗제’를 지낸다. 2,3년에 한 번씩 돼지를 잡고 심방(무당)을 불러다 밤에 가족끼리 제사를 지내는데, 삶을 통돼지를 심방이 12등분해 신에게 올리고 ‘괴네기당 본풀이’라는 무가를 부르며 축원한다. 돗제의 신은 마을 처녀가 다른 데로 시집을 갈 때도 ‘가지가른당’이라 해서 모셔간다.
제주 흑돼지는 육지와 격리된 지역 특성상 조선후기까지 고유 혈통을 유지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외국에서 도입된 개량종과의 교잡을 피할 수 없었다. 제주 축산진흥원의 홍상표 연구원은 “토종 제주흑돼지는 크기가 작고 생산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근대화 이후 사육장에서 외면 받았다”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1908년을 전후해 외래종과 교잡을 시작했고, 1961년 버크셔, 라지화이트 등 생산성이 입증된 외래종이 정식으로 제주 농가에 분양되면서 재래돼지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순수 재래 돼지의 개체 수가 급감해 절종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제주축산진흥원은 1986년 우도 등 도서 벽지에서 재래종 돼지 5마리를 확보해 복원사업을 수행했다. 홍 연구원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한 260여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토종돼지는 농가에 꾸준히 분양할 계획”이라며 “종 보존ㆍ관리 뿐만 아니라 제주흑돼지 보급에도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ㆍ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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