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한 시기 국책(國策)을 그르쳐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각국의 여러분에게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여기서 거듭 통절(痛切)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밝힙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담화’(무라야마 담화)의 골자다.
▦ 10년 뒤인 2005년 종전 60주년을 맞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담화’도 주된 내용은 이를 그대로 땄다. ‘국책을 그르쳐’라는 표현은 빠졌지만 ‘식민지 지배와 침략’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한 반성’ ‘사죄의 마음’ 등은 그대로였다. 대중적 인기몰이를 통해 권좌에 올라 전형적 ‘극장형 정치’를 펼쳐 보였고, 8월 15일 직전의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 참배로 한중 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그였다. 그래도 근린 외교를 고려한 최소한의 과거사 배려는 잊지 않은 셈이다.
▦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8월 15일의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무라야마ㆍ고이즈미 담화의 핵심 표현을 그대로 쓰지는 않을 뜻을 내비쳤다. 그는 24일 NHK 토론 프로그램에서 이전 담화의 키워드를 (올해 발표할)새 담화에도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직접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지배와 침략’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한 반성’ ‘사죄의 마음’ 등의 표현을 멀리 할 뜻으로 해석돼 파문이 일고 있다.
▦ 아베 식 ‘담화 외교’가 대한(對韓) 외교의 방책으로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새롭다. 그는 적어도 총리로서는 ‘고노 담화’ 수정 의사를 명백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과거 발언과 평소의 역사인식, 일본 정부의 재검토 움직임 등에 긴장한 한국 정부가 바짝 매달리면 그제서야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느냐”며 ‘고노 담화 계승’을 언급하는 식이다. ‘무라야마 담화’도 이미 여러 차례 비슷한 꼴을 겪었다. 우리 정부는 얻은 것 없이 진만 빠진다. 직접적 언명(言明)이 아닌 한 아베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지 않는 게 효과적 대응책이자 대일 외교역량 비축 방안이란 생각이 든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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