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부는 규제를 혁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좀 더 빨리 이뤄졌으면 지금쯤 결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기존의 규제를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 사정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사회를 둘러싼 환경이 변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환경의 변화보다 인식은 항상 뒤처지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인식의 지체’다.
인식 지체로 중요 산업을 놓친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이 1839년 영국에서 시행된 ‘붉은 깃발 법’(Red Flag Act)이다. 영국은 이 법을 통해 자동차 산업의 성장추세를 끊고 기존의 마차 산업을 지키려 했다. 자동차 운전 시 최소 3명이 탑승토록 했고, 최고 속도도 시속 4마일로 제한했다. 이런 웃지 못 할 정책으로 1800년대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개발했던 영국은 세계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됐다.
한국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농업과 식품은 특히 새로운 기술에 대한 거부 등으로 인해 인식 지체 현상이 강하다. 유전자변형식품(GMO)가 그 중 하나다. 유전자변형식품은 국내외적으로 과학적 안전성이 입증 됐는데도 국민들이 부정적 인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여론조사를 봐도 일반 국민의 부정적 인식은 높아져만 가는 추세이다. 일부에서는 GMO표시제 확대를 주장하며 이러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주장은 안전성이 입증된 식품에 대해서도 GMO표시를 강요하여 위험하다는 인식을 형성할 우려까지 있다. 과학자들이 구체적 근거를 바탕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하는데 반해 일반 국민들은 직관에 의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20년 가까이 유전자변형식품를 소비하고 있지만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어 기존 식품과 동등하다고 평가를 내렸고 이에 GMO표시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은 GMO 표시가 과학논쟁이 아닌 사회논쟁이 되어버렸다.
사실, 표시제 확대는 실효성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 역으로 GMO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현재 기술로 힘들뿐더러 사후관리로 발생될 비용 등으로 소비자 가격이 상승될 우려, 특히 GMO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낙인효과로 식품업계의 피해도 예상된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위의 폐해를 알려줬을 때는 표시제가 확대됐을 경우의 사후관리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응답이 높게 나왔다. 직관에 의한 막연한 부정적 인식이 아닌 논리나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했을 때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인식의 지체는 비단 해당 산업뿐만 아니라 연관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현재 한국의 생명공학은 크고 작은 부정적 인식으로 등한시되고 있어 기술지체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해외에서는 GMO등 생명공학기술을 통해 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줄여 환경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의약품 개발까지 하고 있는데, 우리는 생명공학산업을 발전시킬 기회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과학논쟁이어야 할 사안이 사회논쟁이 되어 생긴 단적인 폐해다.
시대 흐름에 뒤처진 규제는 산업의 발전을 저해한다. 때문에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흐름을 막는 인식의 지체가 있다면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19세기 영국은 자동차 산업의 초창기에 안전성의 위험과 마차산업에 대한 이해관계로 인해 규제를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지만, 자동차 산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기술개발로 산업을 키워낸 이들이 있어 우리는 현재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 정부도 과거를 교훈 삼아 인식이 지체된 분야를 살펴보고 인식전환을 꾀해 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논의로 산업을 만들어가야 한다. 창조경제의 시작은 바로 인식의 지체에 대한 해소 노력과 규제에 대한 새로운 시선에서 시작된다.
윤영식 한국식품산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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