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차원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는 노력
‘물질적 풍요’ ‘불만과 불신’이 공존
자성의 메시지 간과하지 말아야

요즘 유행하는 단어로 ‘2.0’ 이 있다. 그러니까 예전에 있던 개념이나 현상을 새롭게 재해석해야 할 때 기존 용어 뒤에 새로운 버전이란 의미로 2.0을 붙이는 거다. 이를테면 민주주의 2.0이란 것은 기존의 민주주의 개념을 뛰어넘어, 국민이 위임한 소수의 대표자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 정치에 참여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일컫는다. 어떤 것들은 2.0을 넘어 3.0에 도달한 것도 있다. 1990년 대 처음 등장한 웹은 처음에는 단순히 글자를 읽어보는 정도였다. 그 후 2000년 대 초반부터 글자만이 아니라 음악,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웹 2.0이 등장했고, 웹 3.0 시대인 현재는 읽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웹을 통하여 일반인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다. 아무튼 2.0이란 숫자를 붙이면 뭔가 새롭고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필자도 두 달 전 기고문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뒤에 2.0을 붙이기로 한다.
3개월 가까이 스크린을 점유했던 인터스텔라가 관객 1,000만 명을 가볍게 돌파한 후 극장에서 물러났다. 영화 관람한지 불과 2개월 남짓 흘렀지만 어떤 내용이었는지 벌써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두 장면은 아직 생생하다. 먼저, 영화 초반부 아버지와 딸의 일상생활이다. 주인공 퇴역 우주비행사는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도 딸에게 자연스럽게 과학을 접하게 한다. 결코 의도적으로 딸을 과학자로 키우려고 하지 않았으나,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딸의 사고의 영역이 되고 드넓은 초원은 딸의 실험실 역할을 한다. 결국 딸은 최고의 과학자로 거듭난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시각적으로 가장 멋있는 장면이면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갖고 있는 창의력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랜 우주여행 끝에 우리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 아버지가 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두 사람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그러니까 다른 차원에 놓여져 있다. 한 번 생각해보자. 만일 삼차원 공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이차원 평면에 살고 있는 개미에게 삼차원 세계를 이해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개미의 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차원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개미는 삼차원 세계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19세기에 한 수학자가 저술한 단편 소설에서 영감을 받는다.
‘평면 세계’라는 제목의 이 소설의 배경은 이차원 평면이다. 따라서 등장인물도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도형들이다. 주인공 역시 사각형 남성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삼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둥그런 공이 평면 세계를 방문한다. 이차원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공을 인지할 리 만무하다. 그들의 눈에는 공이 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공을 칼로 자르면 단면이 원이 되기 때문이다. 공은 우리의 주인공에게 삼차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처음에 주인공은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공이 평면 세계에서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원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고서야 삼차원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세상에 이 새로운 사실을 알린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사각형은 이차원 평면 세계의 안정과 체제를 위협하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구속 수감되면서 소설은 비극으로 마친다. ‘평면세계’의 작가 애보트가 살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소위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시대였다. 그는 이 소설에서 철저히 계급화되고 소통이 어려웠던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단순한 과학 지식을 실제 사회 현상에 대입해서 문학이라는 예술로 표현하였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 당시 대중들은 애보트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적인 번영에 취해서였을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역시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대영제국 시대 못지않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반면, 사회 내부적으론 불신과 갈등이 팽배해 있다. 게다가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극도의 환경 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분명히 누군가 ? 과학자든 예술가든, 아니면 자연 그 자체이든 ? 우리에게 자성의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은 뜨고, 귀로 듣곤 있지만 정작 중요한 메시지를 간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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