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남편과 사별, 유머감각 풍부한 '신세대' 어른
맨눈으로 바늘에 실 꿰기 장작 주워 손수 군불 지피기
머리에 스카프 한 채 매일 산책
“땔감은 주워다 때고, 밥도 혼자 해먹을 수 있고, 사는 데 불편한 게 하나도 없어. 전화 있는데, 급한 일 생기면 이장도 부르고 반장도 부르면 돼. 내 일처럼 달려와. 멀리서 요양사가 출장을 오긴 하는데, 뭐니 해도 이웃사촌이 최고야.”
경북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이란분(98?사진) 할머니. 백수(白壽ㆍ99세)가 한 살 남았지만 아직도 또렷한 말투는 중년 못지 않다. 이웃과 수다를 즐기고, 특유의 유머감각까지 이 동네에서는 ‘신세대’ 어른으로 통한다. 4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살아온 이 할머니는 “자식보다 더 좋은 이웃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에겐 자녀가 없다.
이 할머니의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흔아홉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강추위가 아니면 거의 매일같이 2~3㎞ 가량 산책을 한다. 산책 도중에 마을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문 열린 집이 보이면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눠야 일어선다. 자식도 없이, 40년 넘게 혼자 살다 보면 매일같이 신세한탄을 할 법도 하지만 이 할머니에게는 예외다. “아 처음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평생 함께 농사 지으며, 유일하게 의지하던 영감을 보냈으니.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 영감도 열심히 사는 것을 원할 것 같고.” 타고난 낙천적 성격 탓인지, 이 할머니는 이내 힘을 차리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이 할머니는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난방은 직접 군불을 지핀다. 필요한 장작도 집 주변에서 주워와서 해결한다. 수 년 전 지인들이 기름보일러를 설치해 주었지만, 마당 한 켠에 떼어 놓았다. 기름값도 부담스럽고, 생각만큼 따뜻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귀찮아 때를 거를 법도 한데, 소식이지만 삼시세끼를 꼭 챙겨 먹는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절대 과식하는 법이 없다. 싱겁게, 천천히 먹는다. 장수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생활습관이다. 특히 그는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목욕하는 것만큼은 빠뜨리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더 깨끗해야 해. 노인냄새라는 게 있잖아. 청결해야 병에 걸리지 않지. 혼자 사는데 아파서 드러누워봐. 나도 서럽지만, 이웃 주민들에게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지.”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평 남짓한 안방 한구석엔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개어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깔끔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장 이석주(76)씨는 “이 할머니는 아직도 돋보기 없이 맨눈으로 바늘에 실을 끼우고, 직접 이불도 꿰맨다”며 “수첩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반장도 “지인들이 전기밥솥을 구해줘도 냄비에 밥을 앉히고, 손빨래를 한다”며 “세안 후에는 로션 바르기와 식사 후 양치질 하기도 절대 빼놓지 않는다”고 거들었다.
할머니는 한방의 고장 영천한약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자랑했다. “지난해 영천과일한방축제 때 내가 오래 살았다고 무슨 한약을 한 첩 지어 주었는데, 그거 먹고 나서 밥맛이 훨씬 좋아졌다”며 “아 날 모델로 쓰면 그 한약방 대박이 날 텐데”라며 소녀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이 할머니는 외출할 때는 어김없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다. “그냥 나가면 머리가 하얘서 부끄럽잖아. 몸은 이래도 마음은 아직 60대야.” 나이를 잊고 사는 듯했다. “내 평생 병원 한번 간 적 없는데, 나한테는 좋은데 영감한테 빨리 가지 못하는 것은 서운하네. 건강한 게 마치 원수 같네. 그래도 영감은 내가 건강하기를 바라겠지.” 이 할머니는 끝까지 유머를 잊지 않았다.
김성웅기자 ks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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