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강습 동안 빙판서 놀던 아이
축구·농구 이것 저것 다 해봤지만 "피겨 아니면 의미 없어" 본격 입문
자식 농사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코치-선수가 모자(母子)관계라면 볼 것도 없다. 제자 이전에 자식, 스승에 앞서서 엄마다. 마음이 약해지고 의견 충돌이 심하다. ‘야신’ 김성근(73) 한화 감독도 “아들(김정준 한화 전력분석 코치)을 프로 선수로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52)의 두 아들 마커스 조던과 제프리 조던도 모두 선수로 실패했다.
남자 피겨스케이팅의 이준형(19ㆍ수리고)은 피겨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많은 국가대표를 지도한 오지연(48) 코치가 그의 어머니다. 아홉 살 때 피겨를 시작한 오 코치는 19세 때 현역에서 물러났다. 24세부터 지도자 생활을 했으며, 지금도 지현정 코치와 더불어 여자 싱글 1인자 박소연(18ㆍ신목고)을 가르치고 있다. 20일 오 코치와 이준형을 태릉선수촌에서 만났다.
“주위에서 그것밖에 못하냐고 하길래….”
이준형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오 코치가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빙판 한 구석에서 혼자 노는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선수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 맡기기도 뭐하고, 해외든 국내든 무작정 데리고 다녔다. 준형이가 크면서 나름 급수도 따고 했지만, 냉정히 말해 취미로 스케이트를 타는 정도였다. 남자 선수는 특히 장래성도 없지 않느냐.”
본격적으로 이준형이 선수 생활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겨울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에 “오기가 생겨 가르치게 됐다”는 오 코치의 설명이다. 이전까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이준형은 서서히 또래들에 밀렸다. 점프 등 숙달 시간이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이 문제였다. 그러자 다들 “어머니가 코치인데 저것밖에 못 하느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 “이럴 거면 진작에 다른 코치를 붙이지. 도대체 왜 스케이트를 시키느냐. 재능이 없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오 코치는 “하필이면 그 때 굉장히 잘 타는 남자 아이가 등장했다. 아들에게 먼저 ‘스케이트 그만 타자’고 얘기했다”며 “한 달 정도 다른 운동을 배우면서 그 쪽에 재능이 있는지, 아니면 스케이트가 정말 좋은 건지 결정하자고 했다. 사춘기도 다가오고 있어 확실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뒤를 돌아봤다.
“엄마,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
빙판을 떠난 아들은 태권도를 배웠다. 축구도 농구도 이것저것 많이 해봤다. 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피겨 생각뿐이었다. 늘 듣던 음악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엄마, 내가 너무 바보 같다. 왜 스케이트를 못 타나. 다른 애들이 타는 것만 봐도 가슴이 뛰어 죽겠는데.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의미가 없다.” 어머니는 아들이 한 말을 8년이 지난 뒤에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하루 4시간씩의 훈련이 시작됐다. 오 코치는 다른 아이들도 가르치지 않고 중 2때까지 아들만 손봤다. 이준형은 “어렸을 때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함께 편하게 훈련을 했다. 즐거웠다”고 기억했다. 오 코치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얼음 위에서 뛰어 놀아 스케이팅이 자연스럽다. 인위적인 느낌이 없는 게 우리 아들의 장점”며 “다만, 다른 선생님들은 ‘조금 더, 조금 더’라고 밀어붙이는데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참는 부분이 생기더라. 괜히 목소리가 커질 때도 있고, 그 때부터는 안되겠다 싶어 중2 겨울부터 지현정 코치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지 코치와 오 코치는 지금도 한 팀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는 중이다. 오 코치는 “가급적 스케이트와 관련된 얘기는 아들에게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4회전 점프 1년 안에 완성할게요.”
이준형은 9일 끝난 종합선수권대회에서 동갑내기 라이벌 김진서(19ㆍ갑천고)에 10점 이상 앞서며 우승했다. 첫 날 쇼트프로그램에서 뒤졌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짜릿한 역전극을 만들어냈다. 이준형은 한국 선수 대표로 3월 23~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다음달 15~20일 4대륙 선수권도 앞두고 있다.
3년 뒤는 평창 동계 올림픽이다. 이준형은 김진서와 더불어 기적을 꿈꾸고 있다. 현재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기량 차가 크지만 같은 나이 대에서는 상위권 수준이다. 이준형은 “시니어 선수들과 점프에서 차이가 크다. 그 부분에 신경 쓰고 있다”며 “4회전 점프가 필수다.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면 1년 안에 뛸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이준형은 또 “발레, 현대무용이 대표팀 훈련 프로그램 안에 있다. 굉장히 흥미롭고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지금까지 쇼트프로그램에서 ‘클린’ 연기를 한 적이 없다. 당장의 목표는 실수 없이 쇼트프로그램을 마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 코치는 조금 더 목표를 높게 잡았다. 메달이다. 그는 “아들이 소치 올림픽에 나갔으면 평창에서 메달을 꿈꾸겠지만 현실적으로 10위권에만 들었으면 좋겠다”라면서도 “그래도 메달을 목표로 훈련하고 경험을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들과 함께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리겠다”고 웃었다.
함태수기자 hts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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