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빠지고 싶었다. 나는 그곳에서 죽기 싫었다.”
2005년 1월25일 알이탈리아 여객기 탑승을 앞두고 이라크에 무장대원을 보내려 한 혐의로 체포된 셰리프 쿠아치(32)는 당시만 해도 확신범이 아니었다. 스물 두 살이던 셰리프는 이후 조사 과정에서 “나는 (지하드에) 의구심이 들지만 그들이 나를 겁쟁이라고 부를까 봐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속내를 털어 놨다.
그러나 10년 후는 달랐다.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편집국에 들이닥쳐 “예언자를 위한 복수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총을 난사하던 셰리프 모습에서 더 이상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는 완벽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변해있었다.
겁 많던 애송이 지하디스트는 어떻게 냉혈 테러범으로 변모했을까. 뉴욕타임스는 17일 셰리프가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두 번 체포되고 구금되는 과정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셰리프와 두 살 터울의 형 사이드 쿠아치(34)의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사람들은 형제를 평범한 학생으로 기억했다. 사이드와 프랑스 중부 트레냑의 한 기숙학교를 같이 다녔던 무함마드 바다우이(34)는 1994년 각각 14세 12세이던 사이드와 셰리프를 처음 만났다. 바다우이는 “사이드는 호텔 매니지먼트와 관련된 직업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학급 대표였다”고 떠올렸다. 바다우이는 쿠아치 형제가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그들이 종교를 갖게 됐다면 파리에서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쿠아치 형제가 무슬림 네트워크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시기는 2000년 파리 19구 아파트에 살 때로 추정된다. 파리 19구는 북아프리카 출신 노동자계급 무슬림이 많은 지역이다. 쿠아치 형제는 이때 급진적 이슬람 성직자 파리드 베네투를 만나면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베네투의 여동생 역시 학교에서 니캅을 벗지 않아 퇴학당할 만큼 베네투 가족은 강경한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투는 이후 ‘파리 19구 네트워크’를 조직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사원에서 매일 두 시간씩 이슬람 수니파 원리주의 사상(살라피즘)을 가르쳤다. 마리화나 피기를 더 좋아하며 “스스로를 좋은 무슬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던 셰리프는 베네투를 만난 뒤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됐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셰리프는 베네투를 따라 지하드에 참여하게 된다. 베네투는 이라크에 젊은 무슬림들을 동원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고 2004년 9,10월 샤리프와 사이드는 본격적으로 베네투의 아파트에 모여 종교적 정의와 자살폭탄 테러에 대해서 토론하게 된다.
자멜 베갈 역시 셰리프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셰리프는 이라크에 보낼 무장대원을 모집한 혐의로 감옥에 수감됐을 당시 베갈을 만났다. 베갈은 2001년 파리 주재 미국대사관 폭탄 테러를 모의하다 체포된 프랑스 이슬람 극단주의의 대부다. 셰리프는 이후 파리 유대인 식료품점 인질극을 벌이게 되는 아메디 쿨리발리와도 가까워지면서 더 정교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되어 갔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들은 흔한 이슬람 극단주의자와는 달랐다. 눈에 잘 띄는 턱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청바지와 농구화를 신었다. 외관상으로 그들의 테러 계획이나 지하디스트로서의 신념을 눈치챌 수는 없었다. 쿠아치 형제 중 한 명이 2011년 예멘을 여행했을 당시 미국이 프랑스 당국자에게 경고를 했음에도 테러를 사전에 인지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 당국은 3년이나 쿠아치 형제를 감시했지만 의심할만한 정황을 찾지 못했고 더 이상의 감시는 비생산적이라고 판단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난해 중반 쿠아치 형제에 대한 감시를 중단했다. 수백 명의 젊은 무슬림들이 프랑스로 입국하는 현실을 고려해 프랑스는 감시 우선 순위를 교체했고 17명이 숨지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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