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없는 메마름으로 삭막해진 1월 겨울 오후, 문득 그가 그립다. 노래하는 사람 김광석. 하던 일을 곧바로 멈추고 벽면 가득 가지런히 채워진 LP들을 뒤적였다. 어린 시절부터 모으기 시작해 1,000여 장 넘게 가지고 있는 나의 보물들. 그 안에서 ‘동물원’ 시절까지 두루 포함한 ‘김광석’ 음반들을 찾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입가에 절로 웃음이 들어선다. 워낙 많이 꺼내 들었던 탓에 겉 표지 네 귀퉁이가 다 헐었지만 흐뭇하기만 하다. 동그란 검정 레코드를 꺼내 턴테이블 위 회전판에 올려놓는다. 골을 파고드는 바늘의 둔탁한 움직임에 동공이 열리고 짧게 들리는 지직거림에 귀 끝이 곧추 선다. 이어 그의 청아한 울림이 온 방안 가득 퍼지기 시작한다. 한 곡 두 곡 귀에 익은 그의 노래들이 흐르는 내내 나직이 흥얼거린다. 내게는 ‘위안’이자 ‘배려’와 다름없는 그의 노래들이 어느새 ‘나른한 오후’를 상큼한 저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의 노래가 지닌 힘이다.
나는 그를 ‘광석이 형’으로 부른다. 작게나마 인연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를 너무 좋아했다. 공연장이든 어디서든 그는 일상의 소소한 가치들을 전하는 것을 즐긴 ‘특별한’ 사람이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사랑의 감정과 상처들, 그리고 기쁘거나 슬픈 순간들, 용기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의지들 등등. 그의 노래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당신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고, 그래서 꼭 행복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들을 두루 담고 있었다. 하나의 이야기꾼이자 대중가수로서 김광석은 어설픈 가르침이나 얄팍한 사랑 타령 따위로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는 소극장 공연을 통한 직접적인 교감을 더 중시 여겼고 음악을 통해 실제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 나누기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나는 1992년 어느 날부터 그의 공연이 있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인생의 방향성을 잃고 헤매던 그 즈음 막 배우기 시작한 사진에 큰 매력을 느끼며 좋아하거나 마음이 가는 대상을 찾던 시기였다.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도 언제나 사진 찍기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한 채 김광석의 무대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너무 좋다는 것.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 종종 눈이 마주치는 것도 몹시 좋았고 암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흑백필름을 현상, 인화하는 것도 참 좋았다. 시큼한 인화액 속에서 갑자기 말갛게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 ‘형’의 모습들을 보면서 손뼉을 치며 수없이 지새운 밤들은 정말 소중한 추억들이다. 우연한 만남의 시간도 꽤 있었다. 찻집, 길거리 등지에서 그는 내 눈에 자꾸 띄었다. 마음이 가면 확실히 보이는 것이 깊어진다. 서울 홍대 앞 한 술집에서 만났을 때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은박지에 쌓인 ‘키세스’ 초콜릿을 건네기도 했다.(어찌나 떨리던지) 인연이 다시 닿은 어느 날, 나는 그 동안 찍은 사진들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형은 흔쾌히 내 수첩에 주소를 적어주었다. 아마 두 번에 걸쳐 꽤 많은 양의 사진들을 선물 삼아 보냈던 것 같다. 이후 공연장에서 만난 광석이 형은 정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새로 나오는 앨범을 선물하겠다는 약속을 주기도 했다. 꿈만 같은 기억들이다.
안타깝게도 형은 지난 1996년 1월 스스로 삶을 멈추었다. 이후 10년이 지난 즈음에야 나는 속이 상해 벽장 속에 처박아 둔 필름들을 꺼내 사진과 짧은 글을 덧댄 책을 출판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나의 사진들이 잘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인세를 비롯한 모든 수익금을 모두 캄보디아 후원 관련 사업에 보탰는데, 이는 서로 공감하는 사회를 꿈꿨던 그의 노래들을 대신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찍은 사진이지만 나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형의 사진을 쓸 수 없었다. 지금도 어디서든 나의 광석이형 사진들을 원하는 기관이나 매체들의 요청이 오면 ‘달팽이사진골방’의 후원사업인 캄보디아 소수민족 유치원 운영기금으로 쓰일 것을 안내하고 소정의 비용을 받고 있다. 광석이 형은 ‘위안’이 되는 음악을 했고 나는 ‘쓰임’이 되는 사진을 하고 싶은 이유라고나 할까.
올해로 형이 떠난 지 19년이 흘렀다. 호소력 짙은 그의 목소리와 가슴을 울리는 노래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오히려 형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데다 신문 방송 등의 대중매체들은 ‘김광석’의 흔적을 되새기는 일에 앞을 다툰다. 이 와중에 내가 남긴 그의 사진들도 덩달아 춤을 추기도 한다. 떠난 사람이지만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던 사람, 그래서 내 얘기를 노래로 대신 해주는 사람으로서 가수, 김광석이 남아있기 때문에.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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