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엔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감각적 콘텐츠가 쏟아진다. 대중은 책의 소비와 재창조라는 문화적 활동을 통해 책 속의 양분을 끊임없이 수혈 받길 원한다. 문화예술은 우리의 피부 깊숙이 뿌리 박혀 우리의 감정들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교통정리하고 있다. 미디어와 매체, 복합적인 감각의 창조물들이 이미지로 변환되어 세계를 장악하는 가운데 독서의 효용성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저기 인문학운동이 생겨나고 있지만 키보드 워리어나 SNS 애국자들이 넘쳐나는 미디어 시대에 독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이제 소비의 다양성의 한 부분처럼 전락되어 버린 느낌도 없지 않다.
이쯤 되면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지는 감각적인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어디쯤 도달해 있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 마르쿠제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의 삶의 총체성을 책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서점이라는 공간은 도시 안에 있는 죽은 숲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이제 도시에서 서점을 찾는다는 것은 죽은 나무들의 서식지를 가보는 일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서점은 나무가 죽은 후 다른 이름들을 빌려 살고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서점에서 약속을 잡는다. 만일 누군가에게 약속을 잡을 때 서점이 아닌 숲에서 보자고 약속을 하면 둘 사이 간격은 급속도로 어색해지거나 ‘상황’이 발생 할 확률이 크다. 숲에서 보자는 상대라면 무언가 조금 두려운 기분이 들 것이 분명하다. 나무가 살고 있는 공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점을 마냥 숲이라고 우겨댈 수 없을테니까. 이런 이유로 서점이 죽은 숲이 되지 않으려면 무언가 더 긴박한 애정이 필요하긴 하다. 분명한건 이 도시엔 서점을 숲이라고 부르고 살고 싶은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어떤 우정같은 것이다. ‘올드독의 제주일기’의 저자인 정우영은 우정에 대해 담담하게 표현한다. “우정이라는 건 좀 더 어렴풋하되 덜 흔들리는 무엇”이라고.
나무들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한다. 조금이라도 빛을 더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간격을 벌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고 서점에 들어서면 살아남기 위해(경쟁) 서점의 책이 된 나무들은 죽어서까지 아직 죽은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베스트 코너와 화려한 표지로 채색된 매대는 죽은 고기를 부위별로 잘라 올려놓고 파는 정육점이나 축산 시장의 가판대처럼 보인다. 나무는 어느 부위가 가장 맛있을까? 인간의 식욕 중 책에 관한 식욕도 빼 놓을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자의 식성은 변덕스럽다. 주말이 되면 서점에 가서 우리는 나뭇결을 만지며 허기를 채우고 싶어한다. 죽은 나무들의 숲에는 인간의 허기냄새가 풀풀 난다. 사람들은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면서 수많은 나뭇결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확인한다. ‘ 난 도착. 어디쯤 ?’
언젠가 책에서 나무의 진화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나무의 진화를 다루는 방식은 그 나무가 나이테를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크고 높게 자랐는지의 유무도 아니다. 나무에게 있어 진화란 그 수종이 얼마나 다양한 가에 달려있다. 나무는 다양성으로 자신들의 진화를 가꾸어 왔던 것이다. 하물며 다양성에 있어서 책의 진화는 말할 것도 없겠지?
배우 박중훈이 저녁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다 ‘ 예쁜 놈들은 다 베어지고 못 생긴 나무들만이 남아서 산을 지키지요.’
서점에 가서는 산책을 하듯이 거닐어야 한다. 저자의 호흡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 위생에 좋다. 책을 뒤적거리는 것은 삼림욕을 하는 것이다. 지구의 산소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을 나무를 베어 책을 만들었으니 나쁜 책이 된다는 것은 공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좋은 책은 자신이 나무로 살면서 내 뿜을 수 있는 산소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언젠가 자라는 꿈나무들 앞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얘들아 나무가 가장 가치 있게 쓰일 수 있으려면 악기가 되거나 책이 되어야 한다. 그건 어딘가로, 혹은 누군가에게로 끊임없이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야.’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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