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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밤, 그의 삶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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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밤, 그의 삶은 되살아났다

입력
2015.01.1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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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토니 주트 지음ㆍ배현 옮김

열린책들ㆍ240쪽ㆍ1만3,000원

영국 출신 역사학자 토니 주트, 루게릭병 고통 속 쓴 유고에세이

학문적 개성·연대의식 형성한 기억, 한치도 못 움직이는 몸 탓에 구술로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책이 있다. 루게릭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의 유고 에세이 ‘기억의 집’이 그런 책이다. 영국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 학자인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를 연구한 탁월한 역사학자이자 양극화와 불평등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르트르적인 의미의 지식인이었으며, 편견과 대세에 굴복하지 않는 달변가이자 투사였다. ‘포스트워 1945~2005’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등을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그가 루게릭 병 진단을 받은 것은 마침내 명성이 만개한 2008년. 자전적 에세이 ‘기억의 집’은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에 갇히게 된 그가 간호사가 잠이 들고 나면 한 치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길고도 고통스런 불면의 밤을 견뎌내기 위해 과거 속으로 의식의 여행을 떠났던, 추억과 통찰이 혼융된 아름답고도 처연한 기록들이다.

토니 주트의 자전적 에세이 유고집 '기억의 집'은 죽음 앞에서도 유의미를 창출해내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가장 의연한 죽음의 본보기 중 하나다. 열린책들 제공
토니 주트의 자전적 에세이 유고집 '기억의 집'은 죽음 앞에서도 유의미를 창출해내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가장 의연한 죽음의 본보기 중 하나다. 열린책들 제공

런던과 파리, 뉴욕 등으로 옮기며 평생토록 정처 없는 삶을 살았던 코스모폴리탄이자 사민주의자였던 그에게 루게릭은 특별히 고통스런 질병이었다. “단어와 개념의 전달자로 남기 바라는 자”가 메모지와 연필을 사용하지 못하는 데 이어 목소리까지 잃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온전한 의식이 생산해내는 수많은 사고와 전언들을 정지된 육신 안에 감금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생의 의미였을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그는 전사였다. 이 참혹한 고통 앞에서 “운명이여, 올 테면 오라”고 외치며 “그래도 정신이 멀쩡한 데 대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그는 되뇐다. 새로운 삶은 없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는 그대로다. 과거 속으로 돌진해 기억의 집을 지으면 될 일이다. 움직일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밤새 과거의 세부들을 복원해내고 아침이면 전달자에게 구술한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쓴” 이 글들을 두고 그는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아이들이 이 글을 읽고 나를 정겹게 회상했으면 한다. 더 나아가 여기서 그들 모두를 향한 내 변함없는 사랑의 증거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그러나 위대한 지성의 회고담이 그렇듯 여기에는 한 시대, 한 세계의 초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미용사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주트는 하층계급에서 상류계급으로의 이동이 가능했던 능력주의 시대의 산물로서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분명히 인식하며 추억의 집을 재건축한다. 배급제가 실시되던 내핍의 전후 시대 분위기가 ‘함께함’이라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기억은 자연스럽게 자본과 소비가 지배하는 단자화한 오늘날의 세계와 대비되며, 런던을 감싸 안으며 교외를 오가던 그린라인 버스와 생의 마지막까지 그 사랑이 식지 않았던 기차여행은 공간감각을 통해 역사를 사고하는 그의 학문적 특이성으로 이어진다. “잘하면 칭찬했고 성적이 떨어지면 불호령을 내렸던”, 지식을 “인정사정없이 내 안에 집어넣었던” 학창시절의 독일어 선생님은 최고의 스승으로 추억되고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의 침실 청소를 해주던 ‘베더’들과 맺게 된 관계에서는 사회ㆍ경제적 지위 향상을 처음 경험한 이들이 갖추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시온주의자로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10대를 보냈고 68혁명의 장밋빛 기운이 만개했던 파리에서 스무 살을 보냈음에도, 그는 끝내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신좌파가 되고자 하는 열정과 유혹에 면역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보편적 사민주의자로 일관한 그가 세계수도 뉴욕에서 미국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었다. “나는 언저리가 좋다. …그곳에서 코스모폴리탄주의는 일종의 정체성이라기보다는 보통의 생활조건이다. 서로들 자주 반목하고, 충돌이 이따금 빚어지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 내가 뉴욕에서 사는 이유가 그것이다.”

책의 처음과 끝은 주트가 유년 시절 가족과 자주 여행했던 스위스의 소박한 산장 샬레를 추억하는 것으로 열고 닫는다. 그가 기억을 통해 짓고자 했던 집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영구 거주지가 아니라 바로 스위스 여행지의 이 샬레였다. 흑백의 유년기 속에서 총천연색으로 떠오르는 그곳은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없었”던 곳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다. 그때의 자기 나이인 두 아들을 데리고 샬레를 다시 찾은 주트는 좁은 철로가 지나가는 길의 작은 카페에서 생의 마지막 진술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우리는 인생을 어디서 시작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인생을 어디서 마칠지는 결정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고 싶은지 잘 안다. 그 작은 기차 안에서 그 어디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사진설명

토니 주트의 자전적 에세이 유고집 ‘기억의 집’은 죽음 앞에서도 유의미를 창출해내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가장 의연한 죽음의 본보기 중 하나다. 열린책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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