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17일, 톈안먼 진압 반대 자오 10주기… 그는 없지만 가택연금은 '진행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17일, 톈안먼 진압 반대 자오 10주기… 그는 없지만 가택연금은 '진행형

입력
2015.01.16 04:40
0 0

대문 굳게 닫혀 있고 경비 늘 지켜, 외부인에게는 여전히 출입통제구역

트위터 계정 개설·추모 서명 운동 등… 정신 기리는 움직임·개혁 열망 꿈틀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둘째 아들 자오얼쥔이 14일 베이징에 있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가 가택연금 기간 사용했던 유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둘째 아들 자오얼쥔이 14일 베이징에 있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가 가택연금 기간 사용했던 유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당신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 우리의 변하지 않는 선택입니다.’

14일 오후 중국 베이징시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의 자택. 서재로 들어서자 세로로 쓴 긴 붓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들을 무력 진압하는 데 반대했던 자오 전 총서기의 결정과 민주의 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지지자가 보내온 서예 작품이다.

자오 전 총서기의 둘째 아들 자오얼쥔(趙二軍ㆍ63)은 “한국 기자가 찾아온 건 처음인 것 같다”며 아버지가 사용했던 나무 책상과 까만 가죽 의자, 필기구와 서예 도구 등의 물품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사연들을 소개해 주었다.

40㎡쯤 돼 보이는 서재는 책장과 가구, 자오 전 총서기가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로 소박하게 꾸며진 자오 전 총서기의 기념관 같았다. 자오얼쥔은 특히 낡고 헤진 1인용 안락 의자를 가리키며 “아버지는 가택 연금 기간 늘 이곳에 앉아 맞은편 TV를 보셨다”고 설명했다. 톈안먼 민주화운동 때 쫓겨나 2005년 숨질 때까지 16년간 가택연금상태였던 자오 전 총서기의 모습이 그려졌다.

서재 한 가운데 벽엔 자오 전 총서기의 영정이 있었고 그 아래 조문객을 위한 작은 향로와 향도 준비돼 있었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듯한 흰 국화와 화분도 보였다. 자오얼쥔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1월은 물론 4월 청명절과 10월 생신 등 해마다 3차례 제사를 지낸다”며 “이 때마다 100여명의 가족, 친지, 친구, 지지자가 모인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기리는 분들이 점점 늘고 있고, 오는 17일은 10주기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며 “조문객을 위한 작은 기념품 등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서재에서 나와 작은 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자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장방형의 중국식 가옥 사합원(四合院)이 나타났다. 자오 전 총서기의 유골이 이곳에 보관돼 있다. 가족은 자오 전 총서기가 숨진 뒤 화장을 해 유골을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공묘 제1실에 안장하길 원했다. 그러나 당국은 유해를 사국급(司局級ㆍ행정 5급) 간부 구역에 안치하도록 했다. 가족은 지위에 맞지 않는다며 고향 등 안장처를 알아서 정하겠다고 하자 당국은 이를 거부했다. 유골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자오 전 총서기가 숨진 뒤에도 ‘자오쯔양’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이 검색된 게 불과 2년 밖에 안 된다. 그의 기일에는 항상 민주화 인사가 구금됐다. 지난해도 위스원(于世文) 등이 자오 전 총서기의 고향 허난(河南)성 화(滑)현에서 추모제를 열다 체포됐다. 자오 전 총서기의 집도 여전히 외부인 출입통제구역이다. 푸창(富强)골목 6호 사합원인 이 건물은 베이징시 둥청(東城)구가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지만 참관을 불허하는 장소다. 솟을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경비가 늘 지키고 있다.

중국 당국이 자오 전 총서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민주화와 정치개혁의 상징인 그에 대한 재평가는 바로 톈안먼 민주화운동 재평가가 되기 때문이다.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대화로 풀 것을 주장한 자오 전 총서기는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향해 총을 쏘는 것에 찬성할 수 없었다. 이는 톈안먼 시위를 동란(動亂)으로 보고 인민해방군을 동원, 시위를 무력 진압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자오 총서기는 학생들은 폭도가 아니며 계엄 선포는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자오 전 총서기는 결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계엄 선포를 거부한 뒤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후 마지막으로 톈안먼 광장으로 가 학생들을 만났다.

1989년 5월19일 확성기를 든 그는 까만 뿔테 안경 뒤로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 여러분, 너무 늦게 왔습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려면 대화를 해야 하지만 여러분도 어떤 일은 매우 복잡하며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겁니다”라며 “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이 단식을 끝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이 장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방중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은 서방 매체들을 통해 세계로 전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곧바로 가택 연금됐고 숨지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골로 가택 연금 상태다.

그러나 자오 전 총서기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정신을 기리는 움직임과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영원한 자오쯔양’(永遠的趙紫陽)이란 웨이보(微博ㆍ중국판 트위터) 계정이 개설됐고 인터넷엔 그를 추모하는 글도 이어지고 있다. ‘펑펑장펑린’이란 아이디의 한 네티즌은 ‘자오쯔양은 인민들의 좋은 총리였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공민의 권익을 옹호한 영웅이었다’며 ‘용감하게 진실을 말했던 인민들의 지도자였던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홍콩에선 추모 서명 운동이 일고 있다. 홍콩의 톈안먼기념관에서도 추모전이 열리는 중이다.

지난해 덩샤오핑을 기리는 드라마 ‘역사 전환기의 덩샤오핑’에 자오 전 총서기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 것도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다. 이 드라마는 중앙문헌연구실이 고증한 작품이다. 당국의 태도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나온다. 자오 전 총서기의 유골을 적절한 장소에 안치하는 문제가 다시 검토되고 있다는 중화권 보도도 있었다.

자오 전 총서기 집안과 시진핑(習近平) 주석 집안의 인연도 이런 기대감을 키우는 요소다. 시 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자오 전 총서기와 마찬가지로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군대로 강경 진압하는 것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똑같이 광둥(廣東)성 서기를 지내며 개혁 개방을 적극 추진했다는 점도 자오 전 총서기와 시 전 부총리의 공통점이다. 10년 전 자오 전 총서기의 영결식엔 시 주석의 가족들이 조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오 전 총서기의 비서 바오퉁이 최근 “시 주석이 부친의 유지에 따라 ‘다른 의견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고 정치개혁을 추진하길 바란다”며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위해서도 인민들이 자오 전 총서기를 추모하는 것부터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자오 전 총서기의 복권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말한다. 중국 지도자들은 아직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재평가하기 위한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 “먹고 살기 바빠 정치엔 별 관심 없다”는 회사원 장(張ㆍ38)모씨처럼 현실정치에 무관심한 중국인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톈안먼 광장 시위대 앞에서 눈물 글썽였던 한 중국 지도자의 일이 ‘과거사’로 묻혀가고 있다.

베이징=글ㆍ사진 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