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굴곡 속에 애환 간직… 영화 '국제시장' 덕 활력 되찾아
천만 영화의 힘은 놀라웠다.
15일 오후 부산 중구의 국제시장. 평일 대낮임에도 시장 골목은 북적거렸다. 시장에 장바구니를 든 사람 보다는 셀카봉, 카메라를 든 관광객이 더 많은 이색 풍경이다. 재래시장의 주 고객층인 장ㆍ노년층 보다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영화 '국제시장' 보고 꽃분이네에 기념 촬영하러 왔어요." 부산 수영구에 사는 김한나(21·여)씨는 "영화를 보고 촬영지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친구랑 왔는데 영화 속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좋다"라고 말했다. 박재환(35)씨도 "출퇴근길에 매번 국제시장을 지나치지만 방문은 처음"이라며 "영화를 본 뒤 ‘국제시장에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서 꼭 한번 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실제 영화 속 주 무대인 국제시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 덕수(황정민)의 가게인 ‘꽃분이네’ 주변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방문객들로 항시 구름 인파다. 주말이면 몰려든 사람들로 이 꽃분이네 근처까지 진입 자체가 힘들다고 한다.
영화 속 ‘꽃분이네’는 국제시장 3공구 내 ‘영신상회’를 한 달 동안 임대해 촬영한 세트다. 극중에서는 수입품 가게지만 실제로는 스카프, 벨트, 시계 등을 파는 액세서리 가게다. 영신상회 주인인 신미란(38·여)씨는 "영화가 개봉된 이후 일부러 찾아오는 방문객이 많아 간판을 아예 '꽃분이네'로 바꿔 달았다"며 "영화 촬영팀에 장소 대여를 잘한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시장 상인들도 영화 효과를 체감한다고 입을 모았다. 국제시장번영회에 따르면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된 이후 국제시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예전보다 서너 배 이상 늘었다.
국제시장은 8ㆍ15해방 직후 일제가 일본식 신시가지인 서정(西町)을 불태워 버린 공터에 귀환동포와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이뤄진 시장이라고 한다. 국제시장이 부산을 상징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한 건 6ㆍ25전쟁부터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란민들이 몰려들었고, 미군창고 등에서 나온 구호물자들이 풀리면서 국제시장은 규모를 키워나갔다. 외제품들이 넘쳐난다고 해 국제시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도 이때부터다.
다닥다닥 붙은 무허가 점포에선 거의 연례행사처럼 화재가 발생했고, 수 많은 서민들이 피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하지만 매번 점포는 새로 지어졌고, 질기고 질긴 장터의 삶이 이어져왔다. 해방과 한국전쟁, 현대화 등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애환, 악다구니 등을 딛고 일어선 민초들의 자생력을 대변하는 공간이 바로 국제시장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버텨온 국제시장도 십여 년 전부터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의 공세에 크게 위축됐다. 손님들 발길이 줄어 위기를 맞던 국제시장이 뜻하지 않은 영화 한 편으로 모처럼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시장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박명자(61·여)씨는 "요즘 관광객들이 몰려 일할 맛이 난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생선가게를 하는 이임자(58·여)씨도 "젊은 사람들이 국제시장을 많이 찾아오니 시장에 활기가 돈다"고 즐거워했다.
김용운(68) 국제시장 상인회장은 "대형 유통점포로 인해 고객이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영화가 상권 부활의 기회가 되고 있다"며 "시장 곳곳에 영화 촬영지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관광과 쇼핑을 한번에 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 명물 '씨앗호떡'은 매출이 전달보다 50% 늘었다. 국제시장 내 즐비한 어묵가게에서 파는 부산어묵 매출도 40% 뛰었다. 부산 별미 유부 전골을 만들 수 있는 유부주머니 매출은 26%, 부산 밀면은 21% 증가했다.
‘국제시장’의 인기는 국제시장에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기간 인근 자갈치 시장의 명물인 곰장어와 건어물 매출 신장률도 각각 56%, 38%를 기록했다.
영화에서 달구(오달수)가 자신의 소유라고 밝힌 영화관이 있는 비프(BIFF) 광장 ‘영화의 거리’와 덕수 부부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서 부부싸움을 벌이던 용두산공원으로도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영화 한 편이 시장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다.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 지역 호텔업계 등은 ‘국제시장’의 인기를 놓칠세라 발 빠르게 관광 상품화 전략을 내놓았다.
부산관광공사는 영화 촬영 장소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1시부터 무료로 안내하는 투어 코스 운영에 들어갔다. 남포동 부산종합관광안내소~남포사거리~비프광장~먹자골목~꽃분이네~부평깡통시장~용두산공원까지 걸어서 2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다. 안내는 원도심 골목투어 가이드를 하고 있는 이야기할배ㆍ할매들이 맡는다. 공사 측은 국제시장을 부산의 대표 관광코스로 만들기 위해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온 곳들을 통합 안내 표지판에 넣기로 했다. 홍보물 등에 국제시장과 영도다리 도개 현장 등을 엮어 알리는 등 관광객 유치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호텔업계도 올해 들어 영화에 소개된 국제시장 일대를 둘러보는 ‘국제시장 관광 야외 체험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부산웨스틴조선호텔은 국제시장과 용두산공원, 부평깡통시장, 광복동 패션거리 등을 둘러보는 체험 프로그램인 ‘골목대장’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파라다이스호텔부산도 국제시장 관련 관광 상품인 ‘국제시장에 가다’ 프로그램 알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부산롯데호텔은 최근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 전통시장을 체험할 수 있는 전통시장 패키지 운영에 들어갔다.
부산시는 영화의 도시 부산을 알리기 위해 오는 4월 부산 출신 영화인들이 함께 모여 홍보에 나서는 자리를 마련한다. 올해 10월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 20주년을 미리 기념하고 중국 등 해외 한류 문화권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부산 출신 영화인 100명을 초청하기로 했다. 한국 영화계의 대표주자인 송강호, 김윤석을 비롯해 장혁, 공유, 문소리 등은 물론 국내 첫 누적 1억명 관객을 기록한 오달수, 김정태, 이재용, 등 감초 배우와 감독 등 부산 출신이 참여할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부산 출신 영화인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의 자리를 마련하고, 관광과 영상산업 발전을 위한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최근 중국과 영화산업 교류를 위한 업무협약을 하는 등 부산의 영화산업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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