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은 죄다. 혐오 발언도 그렇다. 하지만 대개 범죄가 아니다. 물리력이 없어서일 게다. 틀리든 나쁘든 뚫린 입이다. 불신ㆍ불청이 구속보다 낫다. 비판까지 갇히면 세상은 멈춘다.
“거짓말은 때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간혹 거짓말에 대한 법적 처벌 요구가 무성해지는 건 그래서다. 지난해 세월호 사고 당시 홍가혜라는 여인의 거짓말도 그런 경우였다. (…) 해경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구속됐고,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9일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서다. 다만 재판부는 “이 판결이 홍씨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거짓말은 도덕적 심판을 받을 문제이지 법으로 단죄할 순 없다는 얘기다. 매체를 이용한 허위사실 유포를 법으로 단죄하는 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나온 터다. 2010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허위 경제 전망으로 민심을 동요케 했던 일명 미네르바 사건에서 나온 결정이다. (…) 권위자가 사실이 뭔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민들은 스스로 참과 거짓을 가릴 분별력이 있다. 홍가혜씨의 거짓말은 시민들이 잡아냈고, 미네르바의 거짓은 힘을 잃었다. ‘표현의 자유’. 요즘 프랑스 시사만평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무장테러 이후 세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된 가치다. 이를 계기로 세계 자유 진영 국가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고히 하며 뭉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도 이번 테러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한데 이 성명엔 테러 규탄과 함께 세계일보의 ‘청와대 정윤회 문건’ 보도에 대한 검찰 수사가 국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담았다. 실로 청와대의 고소 사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의식과 요구가 커지는 데 반해 집권층의 의식은 이를 따르지 못하는 후진성을 보여준다. 거짓말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는 건 ‘말’을 위축시킬 때의 부작용이 더 커서다. 사람들은 분별력과 판단력, 발전적 대안을 찾는 비판 능력이 있는데 이는 표현이 자유로울 때 더 성숙해지고, 의식이 성숙해지면 말도 순화된다. 샤를리 에브도 만평은 실제론 다른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때론 역겹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물리적 폭력 앞에 세계인들이 ‘나도 샤를리’라며 펜을 들고 나서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테러는 바로 우리들의 분별력과 판단력에 대한 테러이기 때문이다. (…) 주입된 정의에 대한 맹신은 전체주의를 부르고, 분별력과 비판 능력을 말살시킨다. (…) ‘표현의 자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청와대에도 권하고 싶다.”
-‘거짓말도 표현의 자유다’(중앙일보 ‘양선희의 시시각각’ㆍ논설위원) ☞ 전문 보기
“프랑스 시사 주간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샤를리 에브도가 프랑스 내 소수민족인 무슬림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만화를 많이 게재해서 이번에 공격 대상이 되었기에, 이른바 일베가 여기서 불러일으킨 ‘표현의 자유 제한론’ 또는 ‘무용론’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우선 쉬운 답부터 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법 개념이지 도덕 개념이 아니다. 즉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 개인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기준이지, 개인이나 공동체가 취한 행동이 선하거나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 표현의 자유 자체는 위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표현의 자유의 바탕을 이루는 다원주의 이념은 위기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표현이나 생각이 타인에게 불쾌하거나 이해 불가 하더라도 그 자체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이념 말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어떤 표현이나 생각들은 보호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주장이다. (…) 샤를리 만평을 되도록 많이 구해서 보라. 전체 맥락을 보면 절대로 인종차별적이지는 않다. (…) 샤를리는 세속주의적이었으며 종교의 근본주의 성향에 적대적이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모든 권위에 도전하려는 ‘뼛속까지’ 좌파였으며, 그러한 권위를 성역화하려는 모든 체제에 반대하다 보니 모든 제도권 종교가 대상이 되었다. (…) 샤를리가 만평을 게재할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의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는 무슬림들을 위해서라도 보호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의 저변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종교적 성역을 지키려는 자들이 종교가 더 인간 중심이 되길 바라는 자들에게 가한 응징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반대편의 폭력주의자들이 보복의 근거로 남용할 우려 때문에 “샤를리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 최대의 남용 사례가 바로 9ㆍ11을 빌미로 근거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부시나, 가자를 맹폭하고도 샤를리 시위에 참여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다. 하지만 이들을 제어할 동력 역시 내부에서 올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권력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자유는 더욱 필요하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표현의 자유(1월 13일자 한겨레 ‘시론’ㆍ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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