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초 동안 감독 속사포 주문 전달… 경기 없는 날에도 선수와 동고동락

구리 KDB생명과 부천 하나외환의 KB국민은행 2014~15 여자프로농구 경기가 열린 10일 구리시체육관. 박수호(46) KDB생명 감독대행이 작전 타임을 부르자 통역을 맡은 김소연(26)씨가 가장 먼저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두 외국인선수 사이에 자리잡고 박 감독대행의 지시 사항에 귀를 기울였다.
4대 프로스포츠 통역 중에서도 어학 능력은 기본이고 순발력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는 종목이 바로 농구다. 감독은 전문용어를 섞어 가며 9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ㆍ집약된 내용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에 어지간한 동시 통역사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용병이라고 더 친절하게 설명하는 법도 없다. 선수보다 더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통역이다.
올 시즌 KDB생명의 통역을 맡은 김 씨는 그래서 영입한 베테랑이다. 지난 두 시즌 동안 안산(현 인천) 신한은행에서 일했던 경험을 높이 샀다. 세세한 주문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김 씨는 그렇다 보니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언젠가 한 외국인선수가 감독님의 지적에 분을 참지 못하고 혼잣말로 비속어를 썼는데 다 들으신 거죠. 이걸 그대로 직역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죠.”

김 씨는 7년간 필리핀 유학 경험을 밑천으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주목 받던 영어강사 출신이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필리핀 마닐라에서 우연한 기회에 러브콜을 받고 여자농구계에 투신했다. “그때 신한은행이 필리핀에 전지훈련을 왔는데 통역과 가이드로 인연을 맺었죠.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어학 능력만 있으면 되지만 이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여자농구가 6개 팀이니 한국에서 6명만 할 수 있는 선택 받은 직업이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농구부가 있던 대학 시절 덕에 자연스럽게 스포츠와 친숙해졌다. “처음엔 스크린이 뭔지 몰랐는데 지금은 웬만한 작전도 눈에 보일 만큼 전문가가 다 됐죠.”
대신 시즌이 치러지는 5개월 동안 사생활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선수들과 똑같이 숙소 생활을 하며 모든 훈련 스케줄을 따라야 한다. 말 그대로 용병과 일심동체가 돼야 하는 삶. “그나마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한국에 지인들이 많지 않아 오히려 이 곳에서 친구도 사귀고 저에게는 좋은 직업이죠.” 심지어 가끔 쉬는 날에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낯선 외국인선수들의 가이드를 해 줘야 한다.
‘전쟁’이 벌어지는 코트에서 정확한 통역을 위해서는 용병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사전 교감이 중요하다. 빼어난 미모와 남다른 패션 센스로도 화제를 모은 김씨는 “국적에 상관없이 여자들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 소소한 대화를 하며 친해진다”고 말했다. 아쉬운 건 팀 성적이다. 최하위(4승17패)에 머물고 있는 KDB생명은 최근 감독까지 교체되는 홍역을 치렀다.
“당연히 용병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때 저도 힘이 나죠. 전에 있던 팀에서는 외국인선수들이 비행기를 타는 날 같이 울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성적이 좋지 않지만 충분히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로니카) 하지스, (린제이) 테일러가 그 중심에 있을 거고요.”
구리=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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