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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타난 삼나무 숲길, 흰색의 반대는 초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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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타난 삼나무 숲길, 흰색의 반대는 초록이다

입력
2015.01.1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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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등반객들이 해발 1,300m 지점 사라오름 호수에서 풍광을 즐기고 있다. 상고대와 눈꽃이 풍성하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태고의 원형으로 꽁꽁 얼어붙은 분화구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한라산 등반객들이 해발 1,300m 지점 사라오름 호수에서 풍광을 즐기고 있다. 상고대와 눈꽃이 풍성하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태고의 원형으로 꽁꽁 얼어붙은 분화구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한라산 눈꽃을 보겠다는 의욕은 제주 공항을 나서면서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눈이 내리진 않았지만, 한라산의 높이를 믿었고 일기예보에는 잡히지 않는 변화무쌍한 고산의 날씨를 기대했다. 서울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그날도 제주는 영상의 날씨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가끔씩은 차창을 열어야 할 만큼 서울에 비하면 훈풍이었다.

3월초 들불축제가 예정된 새별오름 등 중산간 도로 주변은 빛 바랜 억새가 몸을 낮추고 있었지만, 한라산 남측으로 넘어서자 익숙하던 겨울 풍경은 자취를 감췄다. 낮은 돌담 사이사이로 귤 따기 체험농장엔 노란 한라봉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두꺼운 야자수 잎은 밝은 햇살에 번들거린다. 겨울 한라산에 가면 언제든 눈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었다.

서귀포 중문관광단지에서 본 한라산 정상. 야자수 뒤로 노을로 붉게 물든 눈 덮인 산정이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서귀포 중문관광단지에서 본 한라산 정상. 야자수 뒤로 노을로 붉게 물든 눈 덮인 산정이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삼나무 숲 너머로 눈 덮인 한라산 정상
삼나무 숲 너머로 눈 덮인 한라산 정상

서귀포 중문관광단지에 도착할 무렵에야 구름에 갇혀있던 한라산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속에서 번지는 햇살이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를 신비스럽게 비추는 동안, 맞은편 한라산 정상도 붉게 물들었다. 거센 바람에 머리채를 흔드는 야자수 뒤로 듬성듬성 하얀 눈을 인 산 머리가 이국적이다. 서편 윗세오름에서 정상으로 끊임없이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예보에 없는 눈이라도 뿌려준다면 좋으련만.

다음날 아침 한라산 동편 등산로 시발점인 성판악 휴게소로 이동했다. 성판악은 제주와 서귀포의 중간지점이다. 5.16도로로 더 잘 알려진 1131번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산자락을 오른다. 두 군데 임시 통제소가 있다. 눈이 내릴 경우 버스와 체인을 장착한 차량만 통과할 수 있고, 더 많이 내리면 전면 통제한다. 난대림 활엽상록수가 산 중턱까지 짙은 초록으로 덮여 있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길가로 치워놓은 잔설도 늘어났다. 성판악 휴게소 부근에 도착하자 자리가 없어 주차장에 들어가지 못한 차들이 길 양편으로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오전 10시가 넘었으니 게으른 등산객에겐 자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제주의 관광객 수는 평일과 휴일의 차이가 다른 지역만큼 크지 않은 탓이다.

해발 750m, 바람 끝이 차다. 겨울산행이 번거롭게 느껴지는 건 방한복을 따로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걷는 동안은 몸에 열이 오르지만 쉴 때는 땀이 식으면서 실제보다 더 추워지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점퍼가 필수다. 예상외로 등산로는 시작부터 눈으로 덮여있다. 아이젠도 단단히 장착한다. 미끄러질까 봐 발목에 힘을 주고 신경 쓰는 것보다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이 발걸음을 옮기기에 한결 수월하고 안전하다. 다행히 기존에 쌓인 눈은 잘 다져져 발목이 빠질 정도는 아니다. 족히 무릎 깊이는 돼 보이는, 군데군데 함정처럼 파인 눈 구덩이는 조심해야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은 온통 눈밭이다. 울퉁불퉁한 지형은 두툼한 눈에 덮혀 완만한 굴곡을 이루고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겨울 풍경을 그린 나뭇가지는 하얀 눈밭 위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워 거대한 수묵화를 펼친다. 곳곳에 검푸른 잎을 매단 굴거리나무가 여백을 채운다.

갑자기 만난 삼나무 숲 초록이 반갑다.
갑자기 만난 삼나무 숲 초록이 반갑다.
눈 덮인 숲에 떨어진 나뭇가지 그림자가 거대한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눈 덮인 숲에 떨어진 나뭇가지 그림자가 거대한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약 한 시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나타난 약 50m 남짓한 삼나무 숲길, 흑백의 대조가 선명한 겨울 산에서 만난 초록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찬 바람도 한 풀 꺾이고 가슴은 푸른 공기로 더욱 넓어진다. 성판악에서 3.5km지점, 속밭대피소를 0.6km 앞둔 지점이다.

이렇게 정확히 기록할 수 있는 건 친절한 이정표 덕분이다. 이곳 등산로 표지판은 다른 곳에서 본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얼마나 왔을까 조바심이 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방향과 거리만 표시한 일반 이정표와는 다르다. 출발지와 최종목적지까지 표고와 거리를 선으로 표시하고, 난이도는 색으로 구분했다. 백록담에 오르는 2개의 등산로(성판악과 관음사탐방로)와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3개의 등산로(돈내코, 영실, 어리목탐방로)까지 함께 그려놓았다. 품 넓은 한라산 자락에서도 현재 위치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주요 지점간 거리와 예상시간까지 표시돼 있어 체력을 안배하며 산행을 즐길 수 있게 한 점도 돋보인다.

이정표 옆에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안내문이 하나 더 붙어있다. “진달래밭대피소에 12:00까지 도착해야 정상에 갈 수 있습니다.” 성판악에서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약 3시간, 안내문대로라면 늦어도 오전 9시에는 산행을 시작해야 백록담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오늘 정상을 밟기는 글렀다. 아침에 늑장 피운 대가다. 아쉽지만 최종목적지를 사라오름으로 수정했다.

4.1km지점 속밭대피소까지는 경사가 완만하다. 이곳에서 사라오름까지는 절반은 평탄하고, 절반은 중급 경사다. 경사의 정도를 파악하기에는 시각보다 땀샘과 호흡이 정직하다. 가파르지 않아 보여도 등에 땀이 조금씩 배는 걸 보면 오르막이 점점 더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휴~ 큰 숨을 내쉬고 하늘을 보는 일이 잦아진다. 겨우살이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작은 초록 잎 사이로 빨간 열매가 알알이 박혀있다. 이름처럼 지금이 제철인가 보다.

기왕에 내린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지만 잘 다져져 발목이 빠질 정도는 아니다.
기왕에 내린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지만 잘 다져져 발목이 빠질 정도는 아니다.
사라오름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주목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사라오름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주목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등산객들이 얼음으로 변한 사라오름 분화구 호수를 가로 질러 전망대로 향하고 있다.
등산객들이 얼음으로 변한 사라오름 분화구 호수를 가로 질러 전망대로 향하고 있다.

5.8km지점 사라오름 입구, 직진하면 백록담이고 왼편으로 빠지면 사라오름 분화구다. 이곳에서부터 약 600m, 시작부터 가파르다. 나무계단은 안전대만 겨우 드러내고 눈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약 10여분을 오르자 갑자기 시야가 넓게 트인다. 더할 나위 없이 푸른 하늘아래 둥그런 호수가 하얗게 꽁꽁 얼었다. 물 빠짐이 좋아서 웬만한 강우량에도 한 달을 못 간다는 산정호수가 태고의 모양 그대로 얼어 붙었다. 청과 백의 완전한 대조, 그 사이를 얕은 산줄기가 띠를 두르듯 분리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듬성듬성 상고대가 붙었다. 언뜻 목화를 얹은 듯, 크림을 바른 듯 부드럽지만 자세히 보면 바람이 부는 반대편으로 쏠린 모양이 자못 날카롭다. 온 산이 하얀 상고대였다면 더없이 환상적이겠지만 자연의 조화에 인간의 욕심은 부질없다. 상고대는 작은 수증기 입자가 나뭇가지에 얼어붙는 현상으로 기온과 습도가 맞아야 형성된다.

왼편 가장자리로 산책로가 따로 있지만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걸어 건너편 전망대까지 걸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숲은 나뭇잎 하나 없어도 밀림이고, 오른편으로는 한라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날이 좋으면 서귀포 시내와 태평양 푸른 바다까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산행에서 배우는 건 언제나 겸손이다. 백록담까지 올랐다면, 눈송이라도 뿌려 주었다면, 상고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면 완벽한 한라산 눈꽃 산행이 되었겠지만 등산로가 통제되는 불운을 피했고, 발목이 눈에 파묻히는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고, 살을 에는 추위도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아쉬움을 달랜다.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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