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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언어, 의미와 이미지에서 자유로워라

입력
2015.01.1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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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물감·작곡가의 음표처럼

시인의 언어는 용도가 아닌 사물의 외곽에 있는 순수한 존재

염불 같은 시 쓰려한 김춘수의 작품

관념을 억압하고 깨려한 것보다 무의미조차 의식 안한 시가 더 좋아

김춘수 시인
김춘수 시인

한국 사람들이 ‘사물로서의 낱말’이니 ‘사물로서의 문장’이니 하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김붕구 선생이 1959년에 번역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일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일반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데 비해, 시인은 그 말 자체를 위해 말을 사용한다고 썼다. 마치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화폭에 푸른색 붉은색을 칠하고, 작곡가들이 높은음 낮은음을 늘어놓는 것처럼 시인들은 가지가지 색조와 음향을 지닌 낱말들을 시 속에 배열한다는 것이다. 푸른색 붉은색에 어떤 느낌이야 있겠지만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악곡에서의 음도 평화 공포 감정 같은 감정을 담고는 있겠지만, 그런 감정들을 지시하거나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르트르가 보기에는 시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시인들은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껍질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듯, 낱말들을 자신의 법칙에 따라 엮는다. 그 말들은 그 자체가 사물이기에 다른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말이 지시기능을 버렸기에, 그 말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지 않으며, 용도가 없기에 순수하다.

사르트르는 랭보의 시구 “오 계절이여, 오 성이여, 흠집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를 예로 들었다. 그가 보기에 여기에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질문을 받는 사람도 없다. 시인은 이 자리에 없다. 게다가 물음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흠집 없는 영혼이 어디에 있다는 말도 아니고 없다는 말도 아니다. 이 질문은 돌이 돌이고 나무가 나무인 것처럼 그저 질문일 뿐이다. 돌이 절대적으로 돌인 것처럼, 이 질문은 절대적인 질문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 견해가 과장된 것은 사실이다. 시인이 이 자리에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살이에서 상처를 입은 한 정신이 이 상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다른 정신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모든 영혼에는 치료하기 어려운 상처가 있다고 물음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이 질문은 또한 우리 마음을 깊이 매혹하여 그 앞에 멈춰 서있게 하기에, 그것이 절대의 형식과 위엄을 지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질문 앞에서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다. 토론할 수도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는 설명조차 할 수 없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처가 되고, 상처 입은 영혼이 되어 그 자리에 어디까지나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문제로 삼은 것은 시의 언어가 지닌 이 절대적인 사물성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시단은 시 언어의 무의미성에 강조점을 두고 이 말을 받아들였다. 중요한 것은 강조점이 달라진 이 말이 우리에게서 순수시에 대한 오래된 논쟁,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빠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 같은 시 쓰기의 방법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에게서는 시는 현실로부터 초탈한 것이어야 하고, 초탈한 시의 언어는 세상의 사물을 지시하고 그 의미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외곽에 나가 있어야 한다. 그 낱말들은 어찌 보면 들어갈 육체가 없는 혼들과 같다. 시의 실제 바탕인 이미지에 관해서도 그의 생각은 같다. 덧없는 세상사가 ‘영원한 언어’인 시 속에 끼어드는 것을 두려워한 이 시인은 세상사의 이치와 삶의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비유적 이미지’보다 이미지 그 자체로 독립된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인 ‘서술적 이미지’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목표로 삼았던 것은 비유적 이미지도 서술적 이미지도 아닌, 염불을 외우는 것과 같은 시, 이미지로부터 해방된 “탈이미지고 초이미지”인 무의미의 시이다. 이 이미지 넘어서기 속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자면 다른 세상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 시론에서 이렇게 썼다. “이미지를 지워버릴 것, 이미지의 소멸, --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뭉개버리는 일. 그러니까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해가게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그것에 의하여 꺼져가야 한다. 그것의 되풀이는 리듬을 낳는다.” 염불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리듬은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 의미가 없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염불이나 다름없는 시도 그 색조와 박자를 우리의 인상에 남긴다.

김춘수가 지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관념이며, 깨뜨리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미지이다. 관념은 그의 생각을 과거에 묶어 두는 족쇄가 될 것이며, 이미지는 그를 현실에 가둬 놓는 감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얻으려는 것은 그 자신이 규정할 수 없는,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규정은 관념을 불러오고 의도는 이미지를 구성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얻게 되는 ‘리듬’은 관념과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이며,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의미의 말로 펼쳐지는 자리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시를 쓰게 된다.

남자의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눈물’의 전문이다. 관념은 최대한으로 억압되었고, 이미지에 관해 말한다면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서로 간섭하여 서로서로 파괴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리듬’만 남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남자와 여자가 지녔을 육체성은 오갈피나무를 거쳐서 새에 도달함으로써 한결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섹스의 이미지가 명백하게 나타난 ‘아랫도리’는 발바닥으로 변조되어 그 음란한 성질의 대부분을 날려버린 것도 사실이다. 육체와 물질은 그렇게 정신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분석하고 보면, 시인은 관념과 이미지를 깨뜨렸다기보다 물질과 정신의 해묵은 이원론적 관념 하나를 리듬만이 남아 있을 자리에 앉혀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인습적인 관념이 규정과 의도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불러오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 원인은 시인이 이미지를 ‘뭉개기’ 위해 사용하는 이미지의 단자들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랫도리가 젖은 남녀는 이런저런 애정소설에서도 클림트 같은 화가의 그림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는 인물들이다. 다른 나무가 아닌 오갈피나무는 서정주의 ‘서풍부’ 같은 관능적인 시와 관련된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물론 예수다. 새에 관해서는 논의가 불필요하다. 그것들은 어느 것도 현실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미학적 전거가 있다. 관념과 이미지를 깨뜨릴 때 먼저 깨뜨려야 할 것은 ‘작품’인데 시인은 오히려 ‘예술’을 현실 위에 모시고 있다. 벌써 관념이 된 예술은 무의미 속에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규정과 의도를 넘어선 새로운 것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공교롭고 아름답지만 너무 빤하게 드러나는 의도를 감추기는 어렵다.

김춘수 시인의 성공작들은 오히려 무의미의 시론 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는 시들, 내세우더라도 의식하지는 않는 시들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로 시 ‘대지진’(1992년의 시선집 ‘꽃의 소묘’)의 전반부를 적는다.

한밤에 깨어보니

일만 개의 영산홍이 깨어 있다.

그들 중

일만 개는 피 흘리며

한 밤에 떠 있다.

밤은 갈라지고 혹은 찢어지고

또 다른 일만 개의 영산홍 위에 쓰러진다.

밤은 부러지고 탈장하고

별들은 죽어 있다.

별들은 무덤이지만

영산홍은 일만 개의 밤이다.

깨어 있는 것은 쓰러지고

피 흘리고

한밤에 떠 있다.

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산홍’의 자리에 불꽃놀이의 ‘꽃불’을 대입하면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린다. 그런데 왜 시인은 시에, 적어도 제목에라도, ‘꽃불’이라는 말을 넣어주려 하지 않았을까. 그는 꽃불이 꽃불 이상의 것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폭발하듯 터져 나온 정신의 어떤 외침일 수도 있고, ‘대지진’처럼 뜻밖에 일어난 세상의 한 변화일 수도 있다. 그것은 꽃불이면서 꽃불이 아니며, 대지진이면서 또한 꽃불이다. 시에서 무의미란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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