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던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건축은 아주 작은 부분만이 예술에 속한다고 이야기했다. 단지 무덤과 기념비만이 예술로서의 건축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 생각은 유럽보다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해 보인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의 개발 시기에 건축의 질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특히 매일 생활하는 집과 직장 같은 공간은 경제적 논리에 충실한 건설의 몫이었다. 건축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의 우수성을 뽐내기 위한 관공서, 독립기념관, 박물관과 미술관 등 공공기관이 대부분이었고, 몇몇 건축가들의 외로운 노력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발의 시대가 끝나가자 이제 건설이 아니라 건축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양적으로는 지을 만큼 지었고 이제 공간의 질을 높여보자는 말이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오해와 위험이 있다. 건축을 기념비나 스펙터클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게 문제다. 스타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으면서 도시가 활성화됐다는 ‘빌바오 이펙트’에 정신을 잃은 이들이 도처에서 비슷한 일을 꾀한다. 그러나 건축물 하나, 구조물 하나가 도시에 들어가면 그 도시의 경제와 활력이 되살아날 것처럼 말하는 이는 몽상가이거나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다. 빌바오 구겐하임의 신화는 빌바오 구도심, 게리의 춤추는 듯한 건물, 구겐하임의 컨텐츠에 계량화하기 힘든 문화적ㆍ정치적ㆍ경제적 맥락이 운좋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화려한 건축이 곧장 도시재생으로 이어지는 법은 없다.
십수 년 동안 랜드마크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은 건물 가운데 랜드마크가 된 것이 있는지 되물어보아야 할 때가 됐다. 엄청난 공실률만 뽐내는 여의도의 IFC타워, 강북 곳곳에 치솟은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서울 전체는 고사하고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라도 자리잡을 수 있을까? 섣부른 판단은 피해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하루도 수만 명이 이용한다고 해서 코엑스나 롯데월드가 서울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을까? 섬처럼 뚝 떨어진 거대 쇼핑몰에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쇼핑하겠지만, 우리는 그 건축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규모가 아무리 커도 도시의 삶 속에 깊숙하게 들어오지 않는 거대 건축물은 스펙터클로, 정치와 자본의 프로파간다로 남을 뿐이다. 최근 랜드마크라는 이름으로, 스토리텔링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한강에 자리잡은 ‘괴물’은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한강이 영화 ‘괴물’의 관광지가 되는 길은 한강에 뭔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킹콩처럼 영화가 다른 콘텐츠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시민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으면 굳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킹콩 조형물을 매달아 둘 필요가 없다. 무형의 콘텐츠를 조형물로 만드는 것만으로 관광 명소가 된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박원순 시장이 재선에 성공한 뒤 서울시가 도시에 접근하는 태도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뉴욕의 하이라인처럼 만들어 보행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서울역이 얼마나 걸어서 건너기 힘든 섬이 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서울의 유서 깊은 두 건축물인 숭례문과 서울역은 지척에 있지만 걸어가기에는 놀랄만큼 불편하다. 삼성생명 본관 앞부터 걸어온다면 횡단보도는 저 멀리 돌아가게 되어 있기 일쑤고, 마지막 통일로를 건너기 위해서는 지하보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걸어다니는 길은 최단거리로 나 있어야 한다. 아파트 화단 모서리에 길이 나듯 에둘러져 있으면 효과가 급감한다. 일제시대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 마주한 관문으로, 삶의 애환이 켜켜이 쌓여 있어도 부족한 이 서울역이 랜드마크는 고사하고 미술관으로 바뀌어 겨우 생명을 연장하는 까닭도 외톨이가 됐기 때문이다. 서울에 랜드마크가 부족한 이유는 멋진 건축물이나 장소, 스토리텔링이 없어서가 아니다. 섬은 등대가 될 수는 있지만 랜드마크는 되지 못한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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