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과 비슷한 게 종교다. 객관도 합리도 신앙엔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믿어야 고요한데. 제가끔 다른 사랑은 무수하다. 참견은 독선이다. 신성불가침 보편 원리로 세속은 굴러간다.
“현대 세계사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국가 간 전쟁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종교 분쟁, 민족 분규, 이념 갈등과 같이 국내 요인에 인해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 종교 분쟁은 그 어떤 다른 분쟁보다도 격렬한 충돌과 희생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이건, 미국이건, 유럽이건, 아니면 개인 차원의 좌절이건 무고한 목숨을 해치는 테러의 명분으로 알라 신(神)의 ‘존엄성’이 자주 동원된다. (…) 사촌지간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자신의 신(神)이 우월하다고 다툴 일이 아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같은 알라신을 섬기면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반목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종교에 대한 그릇된 열정이 신(神) 본연의 성스러움을 훼손시키고 있다. (…) 급변하는 세상에서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좀 더 많은 사람이 신(神)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종교의 과잉은 자칫 세속의 정치 논리와 결합할 경우 평화를 위협함은 물론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까지 가로막는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전통이 잘 정착된 선진국은 아직 소수일 뿐이다. (…) 어느 종교든 자신만 옳다는 우월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남의 다른 점은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세상의 불의(不義)에 눈 감아도 안 되지만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인간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위축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은 ‘자유의 확산’ 정책을 여타 지역의 서구화(西歐化)로 여겨서는 안 된다. 상대국의 역사와 토양에 맞는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을 독려해야 한다.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은 국민의 점증하는 종교심이 외부 세계를 경계하거나 적대시하는 배타주의로 흐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외부와의 종교 분쟁은 국내 권력에 잠시 쓰임새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그 나라 자신과 국제사회 모두가 짊어져야 할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종교는 옳은 길을 비추는 사회의 등불이어야 함에도 국가의 세부 정책 내용까지 언급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 종교 지도자들은 속세의 일에 지나치게 나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공명심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종교 분쟁이 문명사회의 지성(知性)을 위협하도록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이 독차지한 종교를 하루빨리 신(神)의 손에 되돌려주어야 한다.”
-종교 분쟁은 神이 아닌 사람 탓이다(조선일보 ‘朝鮮칼럼’ㆍ김태효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前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 전문 보기
“톨레랑스는 모든 걸 포용하는 이성의 힘이다. 진정한 톨레랑스는 인종과 계급, 정치적 성향뿐만 아니라 종교적 차이까지도 관용한다. 샤를리 엡도가 종교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큰 문제가 없다. 발가벗은 엉덩이를 곧추 세운 채 엎드려 있는 마호메트를 보면서 이슬람교도들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교황이 풍자의 대상이 된 그림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똑 같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절대적이지만 종교는 상대적이다. 따라서 굳이 시비를 가리자면 모욕감을 느끼는 주관적 감정 자체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라면 그런 모욕감을 톨레랑스로 승화시키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다. (…) 톨레랑스의 범주와 대상을 제한할 경우 톨레랑스는 이미 톨레랑스가 아니다. 그럴 경우 차이는 차별로 둔갑되고, 그 차별은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된다. (…) 상대성이론의 요체는 우주에는 절대적 기준점이 되는 좌표가 없다는 것이다. 태양은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 있지만 은하계에서 태양은 희미한 점에 불과하다. (…)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이론을 사회학에 대입하면 모든 것은 모든 것의 톨레랑스다. 동쪽은 서쪽의 톨레랑스고 서쪽은 동쪽의 톨레랑스다. 유럽과 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인과 게르만인도 이와 같다. 이들이 창녀로 묘사되건 시체로 풍자되건 모든 존재가 서로의 톨레랑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은 톨레랑스에 대한 지성의 빈곤이 만들어낸 문명사의 비극이다. 차이 나는 것들의 공존방정식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그 해답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톨레랑스와 종교(한국일보 ‘기고’ㆍ박영규 중부대 초빙교수)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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