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면 부지런히 서로 덕담을 건넨다. 동네 슈퍼에서 두부 한 모 사면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나눈다. 그게 새해 첫 달 첫 주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축복할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다른 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다. 물론 그 바람처럼 그대로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보내느라, 마무리하느라 날린 12월이 그렇듯 1월은 바뀐 새해 적응하느라 어정쩡하게 흘러 보내기 일쑤다.
서민들의 삶은 속으로 이미 퍼렇게 멍들었는데 고관들은 장밋빛 거짓 청사진을 자랑하고 여당 대표는 88만원 세대인 청춘들에게 “아르바이트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일단 열심히 하라.”며 염장을 지른다. 자기 막내아들도 아르바이트한다고 ‘쉴드’까지 치면서. 그 말이 더 야속한 청춘들은 어쩌라고. 경제 살린다고 대기업 총수 사면하려면, 목숨 걸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다 손해배상 소송에 얽힌 이들도 풀어주고 구속된 노동자들도 가석방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에 대한 존중도 삶에 대한 예의도 다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 또 한 해를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걸까? 이미 사회는 어두운 신유신의 시대로 퇴행하였는데 삶의 내용은 그 시절보다 못하다. 그래도 버티고 산다. 제아무리 염장을 지르고 비수를 꽂아도 쓰러지지 않는 건 하루의 힘이다.
‘고마워 하루’라는 책을 읽다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오늘 하루도 너무나 애쓰셨습니다.’라는 멘트가 방송에서 나온다면 울 것 같다.”는 대목에서 울컥했다. 우리들 시민 서민은 그렇게 치열하게 산다. 그런데도 마른 수건 쥐어짜듯 더 조인다. 부자 증세는 못하면서 정작 가난한 이들 주머니 터는 일에는 가히 ‘창조적’이다. 지은이가 ‘아니 왜 새우깡 값은 100원이 아니냐! 세상천지가 70년대인데!’라며 분노하며 외치는 말에 가슴이 아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 다시 부지런히 살아간다. 이젠 하도 속아서 보랏빛 장밋빛 미래 꿈꾸지 않지만 그래도 의무감으로 살지 않고 하루 온 시간을 애틋하게 품으며 채우며 산다.
아무리 내가 선량하고 의로운 소시민으로 살아가려 애써도, 잊을 만하면 비수 꽂아주시는 섬세함과, 위만 떠받들고 아래는 가차 없이 억누르는 철면을 고루 갖춘 지도층(도대체 누가 누굴 지도한다는 건지!)들의 ‘노’ 오블리주의 파렴치가 하루의 명치를 가격해도 ‘언젠가 그리울 오늘’이기에 고마워하며 산다. ‘조금 불편해도 그냥 사람 사이에서 머물고 싶어 하며’ 서로 기대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이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 나는 그냥 좋다. 하루가 고마운 사람들끼리 서로 손잡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만 있어도 덜 힘들고 덜 외로울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음이 고맙다. 그런 사람들끼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 건네고 덕담 나눌 수 있어 1월이 좋다.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겠다며, 납세 거부하겠다고, 서민 등쳐먹는 정부에 저항하겠다고 ‘금연’을 외치며 독하게 마음먹는 1월이어서 좋다. 작심삼일이면 어떠랴. 삼백예순날 백번 작심삼일 하면 되는 게지. 그렇게 허약하되 너그러울 수 있는 1월이 그래서 좋다. 담배 끊는 독한 이도 끊지 못하는 무른 이도 한 해 마감할 때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으면 고마운 일이다.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편 가르고 패 나누는 세상 비웃으며 우리끼리라도 서로 보듬고 손잡으며 살면 세상은 변한다. 그게 바로 연대의 힘이고 가치이다.
거창한 거 꿈꾸지 않아도 된다. 오늘의 하루가 고마울 수 있으면, 그래서 내일 더 고마운 하루를 꿈꿀 수 있으면 된다. 올 한해는 거기까지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된다. ‘겨울공화국’도 봄을 이길 수는 없다. 파렴치한 권력과 탐욕스러운 재력도 연대하는 힘은 이길 수 없다.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한사코 몸을 버둥거려야/하지 않은가/여보게’ 라는 구절을 기억할 수 있으면. 봄은 온다. 그래도 ‘이걸 또 어디다 뒀더라? 내 마음 말이야’하는 애교쯤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1월이면 좋을, 그런 고마움 가득한 하루다. 그런 하루로 삼백 쉰 날쯤은 살아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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