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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ㆍ전쟁ㆍ질병의 현장에서 사진기자는 존엄을 고민한다

입력
2015.01.0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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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40년 넘은 베테랑

늘 현장을 꿈꿔

라이베리아 서 심장마비사

마이클 두 실은 사진 안에 자신의 영혼까지 담고자 했을지 모른다. 물론 “조심조심 신중하게,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휴머니스트로서, 그의 렌즈는 자주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퓰리처상을 세 차례 수상했다. 워싱턴포스트, AFP 연합뉴스
마이클 두 실은 사진 안에 자신의 영혼까지 담고자 했을지 모른다. 물론 “조심조심 신중하게,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휴머니스트로서, 그의 렌즈는 자주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퓰리처상을 세 차례 수상했다. 워싱턴포스트, AFP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11일 라이베리아 에볼라 감염 지역을 취재하다 심장마비로 숨진 워싱턴포스트 사진기자 마이클 두 실(Michel du Cille)은 두 달 전 포스트에 쓴 자신의 칼럼 제목을 ‘에볼라 지역에서 존엄을 지키며 취재하기(Documenting with dignity in the Ebola zone)’라 달았다. 재난과 폭동 전쟁 질병 기아의 현장을 40년 넘게 누비며 3차례 퓰리처상 사진보도부문상을 탄 베테랑 기자인 그는 그 글에서 “피사체의 존엄을 지켜주고자 하는 나의 희망에 대해 카메라는 그 자체로써 하나의 배신인 듯 여겨졌다”고 썼다. 우주복 같은 위생복으로 온 몸을 감싸고도 불안한 나머지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취재. 절망 속에 숨져가는 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손조차 잡아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표정을 찍으면서 그를 괴롭힌 갈등이 그러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에볼라의 끔찍하고 반인간적인 현장을 봐야 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심조심 신중하게,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

두 실이 말한 ‘존엄’은 사진기자로서 그가 추구한 직업윤리의 뿌리이자 열매였다. 하지만 그가 사진으로 지키고자 했고 부여하고자 했던 존엄의 주체는 피사체뿐 아니라 그 자신이기도 했다. 가망 없는 현실, 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그는 자신의 저 신념과 용기, 그리고 생명의 한계가 그어놓은 최대한 먼 자리까지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켰고, 그가 나아간 정서적 거리의 절박한 아슬아슬함으로 피사체의 존엄을 지켰다. 향년 58세.

케빈 카터(1960~1994)의 94년 퓰리처상 수상작 ‘수단의 소녀’와 그의 죽음은 저널리즘의 윤리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남겼다.
케빈 카터(1960~1994)의 94년 퓰리처상 수상작 ‘수단의 소녀’와 그의 죽음은 저널리즘의 윤리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남겼다.

두 실의 저 이야기가 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남긴 사진과 글을 보며, 어쩌면 두 실의 심중에 내려놓을 수 없는 짐처럼 남아 있었을, 비운의 사진기자 케빈 카터(Kevin Carter)가 떠오르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위클리 메일’과 계약한 프리랜스 사진기자 카터는 휴가 중이던 1993년 2월 내전과 기아의 땅 수단을 찾아 간다. 식량 배급소가 있던 아요드라는 마을을 취재하던 중 그는 여린 신음소리를 듣고 배급소 곁 덤불에 다가갔고, 허기로 기진한 듯 엎드려버린 소녀를 보게 된다. 그 순간 소녀의 죽음을 감지한 독수리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한다. ‘수단의 소녀’로 알려진 그의 충격적인 사진은 그 해 3월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실렸고, 아프리카 기아의 참경을 전세계에 충격적으로 알렸다. 그는 이듬해 6월 퓰리처상을 탔고 또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축하와 함께 거센 비난도 감당해야 했다. 아이를 도울 생각에 앞서 사진 앵글을 찾고 타이밍을 기다리는 데 열중한 그와, ‘먹잇감’이 절명하는 순간을 기다리던 사진 속 독수리와 뭐가 다르냐는 거였다. 아예 그 장면을 연출의 결과라고 비난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카터는 ‘뱅뱅그룹’이란 그의 프리랜스 그룹-아프리카 내전지역을 주로 취재해 ‘뱅뱅그룹’이라 불렸다- 친구들이 요하네스버그 교외 총격전을 취재하다 한 명(켄 오스터브로크)이 숨지고 한 명(그레그 마리노비치, 91년 퓰리처상)은 심한 부상을 당하는 일도 겪는다. 그는 퓰리처상 시상식을 다녀온 한 달 뒤인 94년 7월 28일 자신의 픽업트럭에 앉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포토저널리스트 헬 부엘은 그의 책 에 “카터가 남긴 쪽지(유서)에는 (…) 총을 든 미치광이, 굶주린 아이, 시체, 고통의 기억에 사로잡힌 한 남자에 대해 적혀 있었다. 친구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도. 그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라고 적었다.

마이애미헤럴드에 있던 1985년 11월 16일 콜롬비아 화산 폭발의 구조 현장 사진. 저 취재로 그는 86년 첫 퓰리처상을 탄다. AP 연합뉴스
마이애미헤럴드에 있던 1985년 11월 16일 콜롬비아 화산 폭발의 구조 현장 사진. 저 취재로 그는 86년 첫 퓰리처상을 탄다. AP 연합뉴스

미켈란젤로 에버라드 두 실(Michelangelo Everard du Cille)은 1956년 1월 24일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70년대 초 가족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로 이주, 지역 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두 실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16살 무렵부터 조지아의 게인스빌 타임스와 루이스빌 쿠리어 저널, 마이애미 헤럴드 등에서 인턴 사진기자로 일했다. 81년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한 뒤 마이애미 헤럴드의 정식 사진기자가 된 그는 85년 콜롬비아 화산폭발 참사 취재로 동갑내기 여성 사진기자 캐롤 구지(Carol Guzy)와 함께 86년 첫 퓰리처상을 탄다.(구지는 95, 2000, 2011년에도 퓰리처상을 수상, 유일한 퓰리처상 4회 수상자가 된다.)

2년 뒤인 88년 두 실은 마이애미 지역 마약 취재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탄다. 마약이 거리의 일부 흑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 어떻게 파급되고 있는지 심층 취재한 그 기획은 두 실의 발제로 시작됐다. 당시 팀장이던 진 바인가르텐(Gene Weingarten, 현 워싱턴포스트 기자)은 “취재가 시작된 지 2주쯤 뒤 두 실에게 사진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더니 단 한 장도 안 찍었다고 하더라. ‘카메라를 안 갖고 간다. 신뢰가 먼저고, 일은 그 다음이다’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고 말했다.

두 실은 88년 구지와 함께 워싱턴포스트로 직장을 옮긴다. 하지만 현장 기자로서 활동을 이어간 구지와 달리 두 실은 사진 데스크를 맡아 주로 내근을 하게 된다. 2006년 워싱턴포스트의 야심찬 기자들이 미국 사회의 불평등한 흑인 현실을 다양한 분야의 장기 취재를 통해 고발한 기획시리즈 ‘흑인으로 살기(Being a Black Man)’가 그가 기획하고 사진 취재한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 기획은 이듬해 ‘Being a Black Man: At the Corner of Progress and Peril’이란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2007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참전 군인들의 치료 및 간호 실태 탐사보도로 동료 기자들과 함께 세 번째 퓰리처상을 탄다.

2010년 아이티 지진 취재로 생애 네 번째 퓰리처상을 타게 되는 캐럴 구지를 비롯한 포스트지 기자들을 차출해 현장에 보낸 것도, 그들의 사진을 골라 신문에 게재한 것도 두 실이었다.

87년 마이애미의 코카인 중독 폐해 기획 취재 때 찍은 사진. 저 보도로 그는 88년 퓰리처상 특집사진 보도부문상을 탄다. 마이애미헤럴드, AP 연합뉴스
87년 마이애미의 코카인 중독 폐해 기획 취재 때 찍은 사진. 저 보도로 그는 88년 퓰리처상 특집사진 보도부문상을 탄다. 마이애미헤럴드, AP 연합뉴스

하지만 그는 현장이 자신의 자리라 믿었던 기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오랜 동료 기자인 레니 번스타인은 “두 실은 사무실에 앉아 누군가를 인터뷰할 동안 기다리는 걸 무척 싫어했다.(…) 몬로비아의 슬럼과 라이베리아의 전장, 아니면 환자와 사망자들이 모여있는 지옥 같은 현장엘 나가고 싶어 애달아 했다. 현장에서도 그가 원하는 장면이 늘 다음 골목, 다음 모퉁이에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놓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못 견뎌 했다”고 말했다. (WP, 12.11)

그는 몇 년 전 다발성골수종이라는 암이 발병해 화학치료를 받았고, 두 차례 슬관절 치환수술을 받았지만 주위에 알려지는 걸 꺼렸다고 한다. 2013년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현장취재를 강력히 자원, 유엔 평화유지군 철군을 앞둔 아프가니스탄 군대의 방어력 취재를 떠났고, 교전 현장에서 아프간 군 지휘관의 엄호사격 요청을 받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다.

지난해 10월 시라큐스대학 측이 두 실에게 미디어학부생들의 사진 포트폴리오 비평 강의를 청했다가, 강의 당일 초청을 철회한 일이 있었다. 그가 강의 3주 전에 라이베리아의 에볼라 현장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학생이 대학 측에 전염 우려를 제기한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낀 분노와 슬픔을 칼럼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냈다. “나는 연방질병통제국(CDC)이 권고한 에볼라 잠복기간인 3주 전에 귀국했고, 그 사이 하루 두 차례 체온을 측정하라는 CDC의 지침보다 자주 거의 매 시간 내 체온을 쟀다.(…) “대학 당국이 히스테리아에 굴복해서 취재 현장의 실상과 체험담을 들을 기회를 학생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비극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장례식을 취재한 유일한 흑인 사진기자였던 모네타 슬리트(1926~1996)는 저 고요한 격정의 장면을 통해 슬픔에 대한 예외와 기품의 한 전범을 남겼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장례식을 취재한 유일한 흑인 사진기자였던 모네타 슬리트(1926~1996)는 저 고요한 격정의 장면을 통해 슬픔에 대한 예외와 기품의 한 전범을 남겼다.

그 분노 안에, 저 글의 행간에도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사진기자로서의 존엄과 책임을 되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1969년 흑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모네타 슬리트의 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장례식장 사진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대다수 현장 기자들이 분노한 군중과 장례식장을 메운 고위 인사들의 모습을 찍는 동안 장례식장의 유일한 흑인 사진기자였던 슬리트는 아이를 안은 미망인 코레타 스코트 킹의 얼굴을 찍었다.

처연히 젖은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슬픔의 품위. 그 품위를 지탱하던 응시의 시선. 라이베리아의 에볼라 현장에서 두 실 자신이 견지하고자 했던 시선이 그러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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