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소한 구원
라종일ㆍ김현진 지음
알마ㆍ256쪽ㆍ1만3,800원
인간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연인, 친구, 일자리… 어쩌면 청춘의 가장 소중한 세가지를 잃은 30대가 한 사람에게 매달렸다. 구원자는 70대의 석학이자 행정가다. 구원의 도구는 이메일. ‘젊음’은 ‘노년’에게 자신이 얼마나 상처 받은 사람인지, 그래서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털어놓는다. 노년은 시종일관 잔잔한 바다처럼 모든 이야기를 품어준다. 그리곤 경험과 사유로 얻은 지혜를 풀어놓는다. 그렇게 주고받은 편지가 서른 두 통.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사계절에 걸쳐서다. 젊음은 이 편지묶음에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스로를 “몇 권의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삼십 대 초반에도 진로를 고민하는 날백수”라고 소개하는 에세이 작가 김현진(34)씨와 대학 총장,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주영대사 등을 지낸 라종일(75) 한양대 석좌교수 얘기다.
“저는 정말 행복해지고 싶어요.” 젊음은 첫 편지에서 토로한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고요하고 별일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중국에서 발표할 논문을 미루면서까지 라 교수는 김씨의 이메일에 먼저 답한다. “어째서 자신의 상처를 호소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 지역의 고등 정치 문제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리곤 이런 답을 한다. “이야기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상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과 힘을 기르란 얘기다.
“그런 것(상처)들은 그저 ‘사실’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현진이 이런 사실에 불과한 것들을 자신에게 들려줄, 그리고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어떤 이야기로, 설화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목이 마른 젊음은 더 묻는다. “선생님도 누군가를 격렬하게 미워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노년의 답은 또다시 한발 비켜서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혹시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일은 없습니까? 마음의 상처란 주는 사람만큼이나 그것을 받는 사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마음이 맞닿아 있다는 말도 되지 않겠습니까?” 편지의 끝에는 아인슈타인의 경구를 덧붙였다. “어떤 문제이건 그것이 발생한 차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누구 좋으라고 애를 낳느냐”는 젊음의 시대 냉소를 두고는 여러 차례 편지로 논박을 주고 받기도 한다. 청년들이 제 입에 풀칠도 못하는 때에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란 사치가 아니냔 게 젊음의 생각이다.
이 주제에 라 교수는 타국에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던 중 태어난 첫 아기 얘기를 털어놓는다. 본국에서 아내 품에 안겨 온 갓난 아기를 공항에서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아기는 공항이 떠나가게 울고 있었어요. 그 순간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어째서 2,000년 전 고단한 여행길에 외양간에서 태어난 아기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는지.” 비좁은 대학 기숙사 단칸 방에서 세 식구가 거처하면서도 라 교수는 “아기를 보면 한없는 희망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아기가 구원이고 혁명이었다는 라 교수의 고백에 젊음도 “어린 생명이야 말로 그나마 이 세상에서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응답한다.
라 교수의 답신은 때로 원고지 62장(‘세상을 사는 방식’)에 달할 정도로 진지하다.
마지막 편지에서 젊음은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주시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구원은 젊음에게만 찾아온 선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 교수 역시 “누군가에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6년 전 시작됐다. 김씨가 낸 ‘그래도 언니는 간다’를 두고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쓴 호평에 책을 사본 라 교수가 먼저 연락했다. 김씨는 “한창 성장통을 겪는 청춘들, 그리고 어른의 세계에 부딪혀 피를 흘리는 나 같은 늙은 청춘들에게 혼자만 간직하고픈 선생님의 편지들을 권한다”고 밝혔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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