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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무 날도 아닌 어떤 날에

입력
2015.01.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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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초겨울, 한 어르신이 전철역 환승의 갈림길 앞에서 길을 묻고 있었다.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 그 어르신에게 길을 알려드렸다. 어르신은 종이상자에 감을 담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는데 얼기설기 노끈에 묶인 상자는 뚜껑이 없어 붉은 연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같은 전철에 올랐고 나는 어르신의 행동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켜보다가 어르신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아, 아까 나한테 길을 알려준 젊은이한테 감을 몇 개 줄 걸 그랬어.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어르신은 그러고만 마는 게 아니라 생각난 듯이 상자에 든 연시를 옆에 앉은 사람에게 하나씩 건네주고 있었다.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받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어르신은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감을 갖고 전철에 탄 배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르신이 어딘가를 지나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 밑에서 감나무를 올려다보게 되었는데 감이 하도 탐스럽고 아름답게 매달려 있어 감나무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 나라도 멋진 감나무 밑에서는 그랬으리라. 어르신의 그런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집 주인은 “딸 수 있을 만큼 따서 가져가라”고 했단다. 그렇게 딴 감이 얼추 한 상자였다는 것이다. 어르신이 이렇게 한 마디를 보태자 감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감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난 감 따면서 벌써 서너 개나 먹었는 걸.” 나도 감 한 개쯤 얻어다가 책상 앞에 올려두고 오래 바라만 보고 싶었지만 감 상자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훈훈한 감 이야기로 초겨울 며칠 동안 너끈했다.

초겨울이 지나고 겨울을 맞았다. 스승의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일어 강이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카페 중앙에 피워 놓은 난로가에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뭔가를 하고 있던 주인 사내가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를 양보했다. 그 옆자리에 앉겠다고 했더니 한사코 그 자리가 제일 따뜻하다며 그 자리를 권했다. 탁자 위에 어질러놓은 서류들을 챙겨 자리를 급히 옮기는 주인을 보고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 놓으며 주인이 내게 물었다. 저녁은 먹었느냐고. 사실 나는 그날 저녁을 먹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후였다. 매일 먹는 저녁 한번쯤 거르고 대신 그 시간에 앉아 이것저것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은 저녁을 맞닥뜨린 것이다. 안 먹었다고 했더니 근처에 이런저런 밥집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늦게라도 챙겨먹으라는 말을 건넸다. 낯선 곳에서의 그런 따뜻한 말은 때로 굉장한 온기로 발열한다. 옆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나무 타는 냄새 덕분에 더 그랬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다시 그곳에 가게 되었다. 다시 찾은 이유가 당시 잔돈이 없다며 내 커피값에서 받지 않은 오백 원이 걸려서는 아니었다. 가는 김에 오백 원도 치르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다시 그때 그 시간처럼 글을 쓰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카페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서 오백 원을 더 받으라고 했다. “저번에 오백 원 잔돈이 없다고 안 받으셨어요.” “어? 그런 적 없는데요.” “제가 다음에 여기 다시 올 땐 드리겠다고 했더니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커피 한잔에 사천 원인 겁니다’ 라고 했는데요.” “어? 제가요?”

주인은 아무 기억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한테 저녁을 먹었느냐 물어서 안 먹었다 했더니 ‘꼭 드세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굶으면 안되죠’ 라고 했고. 나갈 때 다시 한 번 ‘저녁 맛있는 걸로 꼭 챙겨 드세요’ 라고 했었는데. 그는 기억에 없다고 했다. 나라는 사람은 저녁 챙겨 먹으라는 말로도 벅차게 차오르는 사람인데 게다가 ‘맛있는 걸로 꼭’이라니. 하여 그 말의 여운이 얼마 동안 나를 따라다니고 잡아당겨서 다시 여기를 찾아온 건지도 모르는데 기억에 없다니.

전철에서 감을 나눠준 어르신도, 카페에서 밥도 못 먹고 다닐 것처럼 생긴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이도 그냥 살면서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냥 허구한 아무 날들 가운데 내키는 일을 한 것이니 나 같은 사람이여, 부디 이런 일에 밑줄을 긋지 않고 살면 또 어떨런가.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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