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史記)에 ‘골계(滑稽) 열전’이 있다. 골(滑)은 익살스럽다는 뜻이니, 재미있는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열전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제(齊)나라의 순우곤(淳于?)인데, 사기는 “키는 칠 척에 미치지 못했지만 익살스럽고 다변(多辯)이어서 여러 차례 제후에게 사신으로 갔는데 굴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 2’에 순우곤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진(蘇秦)이 연나라를 위해서 제(齊)나라를 설득하러 갔는데, 제 나라 왕을 만나기 전에 먼저 순우곤을 만나서 말했다.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팔려고 시장에 사흘 동안이나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준마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백락(伯樂)을 찾아가서, “선생님께서 오시면서 한 번 보시고 가시면서 한 번 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백락이 그의 말대로 하자 하루아침에 말의 가격이 열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우곤이 소진을 제나라 임금에게 만나게 주선했는데 제나라 임금이 소자(蘇子ㆍ소진)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다.
당나라 유학자 한유(韓愈)는 ‘잡설(雜說)’에서 이 사례를 들면서, “세상에 백락이 있은 연후에 천리마(千里馬)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록 명마라도 노예 마부의 손에 욕을 보다가 구유 사이에서 나란히 죽어서 천리마라는 칭호를 듣지 못한다.”라고 갈파했다. 한유의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함을 압축한 유명한 말인데, 한유가 이런 통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도 한때 쓰이지 못해서 크게 고생했기 때문이다. 한유는 재상인 가탐(賈耽)과 노매(盧邁) 등에게 올린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과거에 네 번 응시해서 겨우 한 번 급제했고, 이부(吏部)에 세 번 천거되었지만 끝내 벼슬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9품의 지위라도 바랄 수 있으며, 1무(畝)의 궁전인들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보통 100평 정도의 전답을 1무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이 일상화된 세상이었기에 각국의 제왕들은 우수한 인재 초빙을 위해서 무척 애를 썼다. 강국 제(齊)나라에게 시달림을 받던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자신의 몸을 낮추고 후한 예물을 주면서 천하의 현자들을 초빙하려고 한 것도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나라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인재들이 오지 않았다. 소왕이 곽외(郭?)에게 인재를 초빙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더니 곽외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한 임금이 있었는데 천금으로 천리마를 구하려고 했지만 삼년이 지나도록 구하지 못했습니다. 연인(涓人ㆍ관직명)이 구해오겠다고 청해서 보냈더니 석 달 만에 천리마를 구했는데 이미 죽은 말을 오 백금을 주고 사왔습니다.(전국책-연책 1)” 임금이 “내가 산 말을 구해오라고 했지 어찌 죽은 말을 오백금을 주고 사오라고 했느냐?”라면서 크게 화를 낸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연인은 “죽은 말을 오 백금을 주고 샀으니 하물며 산 말이겠습니까?”라면서 산 천리마가 곧 올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과연 한 해가 가기 전에 천리마가 세 마리나 왔다는 것이다. 곽외의 말은 먼저 자신을 잘 대우하면 천하에서 현자가 올 것이라는 뜻이었다. 연 소왕이 곽외를 위해서 궁전을 세우고 왕사로 대접하는 한편 연경(燕京)에 황금대를 세우고 인재를 초빙하니, 악의(樂毅)와 극신(劇辛) 같은 인재가 대거 몰려왔다는 이야기다.
조선에서 인재 발탁에 능했던 재상은 서애 류성룡(柳成龍)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류성룡이 없었다면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이름 없는 군관으로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순신은 44세 때인 선조 21년(1588년) 윤6월에 조산만호에서 또 제관(除官)되면서 실직자가 될 정도로 관직생활이 곤궁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류성룡이 이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선수실록 22년 12월 1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여 전인 선조 24년(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갈 수 있었던 것도 류성룡의 천거 덕분이었다. ‘한 사내가 오솔길의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말을 남겼던 이순신을 그 오솔길로 보낸 인물이 류성룡이었다. 한유의 말을 조선에 적용시키면, “이순신은 늘 있지만 류성룡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할 수 있다.
개각설이 한창이다. 과거처럼 “그 나물에 그 밥”이라든지 “하자 투성이 인물들만 고르는 것도 재주는 재주”라는 식의 조롱이 되풀이 되는 인사라면 미래가 없다. 능력은 있지만 ‘○○피아’에 속한 줄이 없어서 적체되어 있는 인재들이 발탁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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