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3일 표도 없다고요? 12일은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시가 고향인 왕자싱(王嘉星ㆍ48)씨는 5일 오후 베이징역 15번 창구 앞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기차표를 문의하고 있었다. 검구릿빛 얼굴과 깊게 패인 주름살엔 농민공의 고단한 삶이 배어 있었다. 초췌해 보이는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왕씨는 창구 너머 철도원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를 두드리던 철도원에게서는 “12일도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차표를 살 때 제시해야 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거민(居民)신분증’과 표 값으로 마련한 위안화를 구겨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맥 없이 풀렸다. 중국 설인 춘제(春節ㆍ2월 19일)에 맞춰 간만의 귀향을 꿈꿨던 왕씨는 결국 이날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 그는 “일 때문에 시간을 못 내 이제야 왔더니 너무 늦은 것 같다”며 “반환 표라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설 기차표 전쟁 한국보다 한 수 위
40여개 기차표 발매 창구 외에 50여개 자동발매기 앞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출발역과 도착역, 날짜 등을 입력하는 화면 앞에서 녹갈색 모자를 쓴 한 남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입력을 하고 있었지만 화면에는 설 연휴 기간 2월18~24일 표는 매진이었다. 그는 “연휴 시작 1주일 전 표도 없다”며 한숨을 내 쉬었다.
중국에서 춘제 귀성표 구하기 전쟁이 치열하다. 지난해까지 예매는 20일전부터 가능했지만 최근 이 기간이 60일로 늘어나 귀성표 전쟁은 이미 지난달 초부터 시작돼 일찌감치 매진됐다. 표의 공급이 수요에 턱 없이 부족한 데다 암표상을 일컫는 황뉴당(黃牛黨ㆍ이전에 역전 인부들의 옷이 노란색이었던 데서 유래)의 횡포도 근절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기차표는 전화, 휴대폰 애플리케이션, 인터넷, 기차역 및 발매 대행 창구 방문 등을 통해 예매할 수 있다. 발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되고, 인터넷의 경우 아예 접속이 안 되는 것도 한국과 사정이 비슷하다. 지난달 7~21일 기차표 예매 공식 인터넷 사이트에는 무려 6억9,790만명이 등록을 했지만 이 기간 예매 표는 6,281만여장에 불과했다. 100명 중 91명이 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특히 춘절 연휴 직전 기차표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연휴 시작 이틀 전인 2월 16일 표를 예매할 수 있었던 지난달 19일 공식 인터넷 사이트의 방문 횟수는 무려 297억번을 기록했다. 이날 팔린 기차표는 956만4,000장이었다. 사이트를 300번 정도 방문해도 표 한 장 사기 힘들다는 계산이 나온다.
표 싹쓸이 암표상 ‘황뉴당’ 골칫거리
하지만 황뉴당은 최첨단 설비와 관시(關係)를 동원해 표를 매점매석한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황뉴당이 사용하는 인터넷 속도는 100메가(Mbps)에 달한다. 중국에서 일반인이 사용하는 인터넷 속도는 보통 10메가 안팎이다.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며 숨가쁘게 손가락을 놀려봐야 황뉴당을 이길 수 없다. 더군다나 황뉴당은 기차표 예매 전문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1초에 3번씩 자동으로 예매 사이트에 접속해 표 구입을 반복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24시간 내내 환불되는 기차 표가 생기는 지 확인하고 그 즉시 해당 표를 예매한다. 경찰은 이런 황뉴당을 잡기 위해 ‘매 사냥’ 작전까지 벌이고 있다.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은 6일 공안부 형사조사국을 인용해 지난달부터 전개된 이 작전을 통해 모두 523명의 암표상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들에게서 기차표와 예매증 12만여장에다 가짜 기차표 12만3,000여장까지 압수했다.
이런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암표상의 수법도 갈수록 치밀해져 가고 있다. 황뉴당은 또 이전에는 고정된 몇 개의 아이디를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아예 구매자의 아이디로 표를 예매해 경찰의 추적을 따 돌리고 있다. 이 경우 경찰에 꼬리가 잡혀도 자신들은 암표상이 아니라 ‘구매 대행’ 했을 뿐 이라고 발뺌할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프로토콜(IP) 주소를 수시로 바꾸는 것은 기본이다. 중국은 암표상을 근절하기 위해 2012년 기차표 실명제를 도입했지만 구매 현장에서 일일이 신분증의 진위까지 가리기는 힘들다. 개찰구에 들어설 때 다시 신분을 확인하지만 이도 형식적일 때가 많다.
일부 철도원과 황뉴당의 오래 된 ‘관시’를 한 순간 없앤다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환불되는 표가 이들 철도원을 통해 황뉴당의 손에 들어간다. 직통 열차나 쾌속 열차, 임시 열차의 경우 차장이나 승무원이 일부 예비표를 남겨 두었다가 황뉴당에 넘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암표는 날짜와 구간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통상 장당 100~200위안(1만8,000~3만6,000원) 안팎의 웃돈이 붙는다. 일부 암표상의 하루 수입은 1,000위안(18만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졸 신입사원 첫 월급이 통상 3,000위안 안팎인 걸 감안하면 고소득이다.
귀성표 구하려는 SNS 미인계도
기차표 사전 예매 기간을 늘려 황뉴당의 수입만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뉴당의 영업 기간만 늘려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입이 두 배로 늘었다”고 말하는 암표상도 있다. 출발일 15일 전에만 표를 반환하면 별도의 수수료를 받지 않기로 한 것도 황뉴당에게는 기회다. 이 시기에 임박해 나오는 환불 표를 조직적으로 사들여 되팔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의 경우 춘제를 앞두고 환불된 표가 하루 평균 46만여장에 달했다.
이처럼 기차표를 구하기 어렵자 웨이보(중국판 트위터) 등에 귀성표를 구해달라는 글과 함께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여성까지 등장했다. 남성들의 관심을 끌어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도대체 기차표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이냐” “집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힘든 건가” 등의 불평도 적지 않다.
결국 기차표를 구하지 못할 경우 대안은 비행기와 버스. 그러나 비행기표 가격은 이 기간 평상시의 3~10배로 올라 일반인의 한 달 월급을 넘어서는 경우도 많다. 침대가 설치된 장거리 고속버스 표도 많지 않다. 다만 고속버스 표는 한 달 전 예매가 가능해 기회는 있는 셈이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농민공 중에서는 할 수 없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며칠씩 걸려 귀성하는 사람들도 많다.
직접 차를 몰고 귀경길에 나서는 이들도 차츰 늘고 있다. 중국에서는 춘제 연휴 기간 고속도로 이용료가 없다. 베이징에서 1,500㎞ 떨어진 장시(江西)성이 고향인 위춘잉(余淳英)씨는 “가까운 친척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갈 생각”이라며 “20시간 넘게 걸려도 고향 간다는 생각에 설렌다”고 말했다. 2월4일부터 3월15일까지 춘윈(春運) 특별 운송 기간 중 중국내 이동 인구는 사상 최대인 연 40억명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이징=글ㆍ사진 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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