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 명문대 운동권 서클 내
좌파 이념과 현실 사이에 놓인
태생적 우파들의 딜레마 그려 내
1998년은 컴퓨터 게임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된 해다. 아이돌 그룹 ‘신화’와 ‘핑클’도 이때 데뷔했다. 이 무렵 대학에 들어간 이들이 본 것은 ‘흔적’이다. 전경을 피해 운동권 선배들이 매달렸다던 건물의 창틀, 신발에 막걸리를 담아 돌렸다던 잔디밭, 토익책이 아닌 금서를 몰래 팔았다는 학내서점. 그러나 투쟁의 치열함이 영광의 척도가 되던 시절은 지났다. 그렇다고 스펙을 영광이라 대놓고 말하기엔 아직은 부끄럽게 여기던 시기였다. 손아람 작가의 장편소설 ‘디 마이너스’(자음과모음)는 이 짧은 과도기를 포착한다. ‘자본론’이 토익책에, 김광석이 아이돌에, 학생운동이 스타크래프트에 자리를 내주기 전 그 둘이 잠시 공존했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태의는 선배 미쥬를 따라 학생운동 정파인 연대회의에 들어간다. 학생운동에 대한 열정이 아닌 미쥬를 비롯한 학회 선배들에게서 풍기는 지성의 향기 때문이다. 미쥬의 남자친구 대석 형, 10년째 졸업을 못하고 있는 현승 선배, 과 동기 경수도 모두 학생운동을 하며 만난 동료들이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에 순전히 사로잡힌 선배들과 달리 태의는 내내 흔들린다. “정당한 노동으로 돈 벌 생각을 해라.” 대석은 과외를 하는 태의를 나무라며 생산만이 노동이라고 강조한다. 그들 사이에서 서울대라는 위치를 이용하는 건 금기다. 약자가 억울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강자의 자리에 올라서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란 스펙은 이들에게 원죄다. 미쥬의 집이 위치한 강남이란 지역도, 경수 아버지의 경기도 도지사란 직업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순수한 신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밤새워 토론했던 나날이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이들은 둘 중 하나를 희생시켜야 하는 시험대에 오른다. 누가 이 시험에 통과할 것인가.
소설은 김대중 정권이 물꼬를 튼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는 모습을 포착한다. 절대평가가 상대평가로, 인문서가 경영서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서울대는 이제 자랑스런 간판이 아닌 생존의 방편이다. 그 유일한 목숨줄을 자신의 분노도 아닌 “역사로부터 이전 받은 분노” 때문에, “알량한 껍데기뿐인” 신조 때문에, 결국엔 신념을 저버리고 세상 속으로 편입되고 말 저 선배들의 부추김 때문에 버릴 수 있을까.
‘디 마이너스’는 겉으로는 물샐 틈 없이 단단해 보이는 학생운동 조직의 내부로 들어가 그 균열을 포착한다. 그것은 반대쪽 진영이 환영할만한 폭로도 아니고, 좌우 모두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양비론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이야기다. 손아람 작가는 “좌파적인 사고를 가졌지만 태생적으로 우파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처한 딜레마와 거기서 파생된 긴장”을 짚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좌우의 눈에 비친 반대 진영의 모습은 괴물에 가까워요. 정치적으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것뿐입니다. 그게 가능한 곳은 가정과 학교뿐이고요. 누가 어떻게 좌파가 되고 또 왜 좌파를 떠나게 되는지, 그 과정에 얽힌 인간적 역학관계를 학교를 배경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작가는 언론은 사건만 이야기하고 문학은 인간에 대해서만 말하는 풍토에 아쉬움을 표했다. “모든 사건에는 인간적 논리가 작용합니다. 사회 현상 안에서 인간의 역학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지금 소설의 할 일이라 생각해요. 하나의 좋은 이야기가 아주 조금씩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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