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정파별 자기 사람 심기 수단으로 명단 비공개에 밀실 협의로 결정
함량 미달의 비전문가들 줄 잇고 공천 헌금 파동으로 의원직 잃기도
“우리 당은 비례대표 후보를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시민운동에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폭넓게 후보를 내지 못했고, 노인세대의 대표도 내지 못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해 10월 28일 전국 광역의원 대상 강연에서 지적한 비례대표 의원 선정방식의 문제점이다. 민주적 절차와 국민적 공감대 없이 특정 세력의 입김이 과도하게 반영됐다는 지적이다. 문 의원이 거론한 2012년 4월 19대 총선 때는 한명숙 전 총리가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를 맡았으며 한 대표는 문 의원과 같은 정파인 친노 계열로 분류된다. 하지만 친노 진영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후 야당의 대선주자로 발돋움해 당내 영향력이 막강했던 문 의원조차 비례대표 의원을 어떻게 정하는지 몰랐다는 얘기다. 그럼 정당의 비례대표 의원 후보를 누가 정하는 것일까.
정파간 나눠먹기로 전락
한국 정치에서 비례대표는 ‘그들만의 리그’를 거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통상 비례대표 후보는 당의 공식기구인 공천심사위원회에서 확정한다. 정치혁신과 계파주의 청산을 표방하며 공심위에 민간위원들이 대거 참여하지만 결국에는 계파간 이해관계에 따라 비례대표 후보를 정하는 게 관례다. 경선을 거치는 지역구 의원과 달리 비례대표는 후보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밀실에서 협의해 결론까지 내리다 보니 자연히 후보의 자질보다는 당 대표나 계파수장과의 친소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19대 총선 당시 민주당의 경우 공심위가 아니라 당내 특정세력이 재야원로 원탁회의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공심위 내부의 계파갈등에 외부파벌의 영향력까지 겹쳐 각 정파가 자기사람 심기에 주력한 셈이다.
새누리당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비례대표 공천과정에 계파주의의 그늘이 짙게 깔려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여러 갈래로 계파가 쪼개진 야당에 비해 외견상으로는 잡음이 적어 보인다. 반면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쳐야 하는 여당의 특성을 감안해 밖으로 극명하게 표출되는 갈등의 수위가 낮을 뿐이라는 지적도 많다.
여권 관계자는 6일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친박 프레임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박근혜 충성파로 비례대표 의원이 대부분 채워졌다”며 “이들 상당수가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다”고 말했다. 총선 공천을 앞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친이-친박으로 양분된 구조에서 비례대표 의원은 승자독식의 논리가 강하게 반영되는 만큼 후보 선정을 놓고 친이계 측에서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례대표는 당 보스의 전위대?
비례대표제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발탁해 대의기관인 국회의 역량을 높이고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소수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제도다. 취지만 놓고 보면 자기사람 심기에 혈안인 고질적 계파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계파의 세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전문성은 뒷전이고 당 지도부에 대한 충성도를 앞세워 선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계파별로 후보를 추천하고 정치적 상징성에 따라 순번을 매기다 보니 일부 비례대표 의원들은 전문성 부족으로 눈총을 사기도 한다. 18대 국회의 친박연대 양정례ㆍ김노식, 19대의 새누리당 현영희 등 비례대표 의원들이 잇단 공천헌금 파동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것도 공천과정의 계파주의와 무관치 않다.
중진의원을 지낸 한 야권인사는 “비례대표 공천심사에 앞서 계파별로 할당된 의석수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며 “계파수장이 자기 식구들을 먼저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대의를 내세워 비례의원의 전문성을 따지기는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각 분야 최고 전문가를 비례대표로 영입해야 하는데 공천과정을 계파논리가 지배하면서 함량 미달의 인사들이 속속 국회에 들어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선 위해 총알받이 감수
반대로 비례의원들이 계파수장이나 당 지도부의 뜻을 받들어 악역을 맡는 총알받이를 자처하기도 한다. 재선을 노리기 위해서는 지역구 공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가진 각 계파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비례의원들이 자신들을 발탁해 준 보스의 눈치를 보느라 당 지도부를 앞장서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18대 국회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한 인사는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80% 정도는 재선을 준비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연고가 있는 지역구 의원들은 표밭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경조사라도 찾아 다니며 발품을 팔면 되지만 비례의원들은 어디에도 기댈 구석이 없다”며 “당내에서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터질 때마다 소속 정당의 나팔수로 나서는 안쓰러운 상황이 많다”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례대표 의원들이 출마 희망지역을 미리 찾아 주민들과 만나는데 시간을 쏟는 경우가 다반사다. 접촉면을 넓히고 인지도를 높여야 공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연말부터 여야가 지역구 당협위원장을 새로 뽑는 과정에서 현역 비례대표 의원들이 대거 응모해 출혈경쟁을 벌여 눈총을 사기도 했다. 국회 관계자는 “비례대표 초선의원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지역구에 올인하면 비례대표제의 존재이유가 없다”며 “눈도장이 아니라 전문성과 정책으로 승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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