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휴가를 다녀온 뒤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보통은 3, 4일 앓고 나면 좋아지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매우 심했다. 목이 아프기 시작하다가 콧물이 계속 흐르고 기운도 없었다. 코막힘이 심해서 약을 먹어도 거의 2주 가까이 고생을 했다. 모임에도 못나가고 주말에는 집에 누워서 쉬기만 했다. 점차 좋아지다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약을 먹지 않고도 콧물도 흐르지 않고 머리도 아프지 않고 개운한 느낌이 들어 정말 살 것 같았다. 감기처럼 작은 고통을 겪고 난 후에도, 아프지 않을 때가 얼마나 좋은지를 느끼니 그날은 정말 행복했다.
요즘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편안함에 즐거울 때가 많다. 어느날부터인가 출근 때 하늘이 맑으면 정말 기분이 좋다. 늘 보는 하늘이지만 미세 먼지로 뿌연 며칠을 보내고 난 뒤에는 파란 하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번 휴가에서도 이런 부분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겨울 자체를 느끼기 위해 떠났다. 산골로 여행을 가니 내리는 눈은 너무 아름답지만 놀기에는 힘들었고 인터넷도 잘 되지 않아 답답함이 심했다. 연락받지 않고 쉬기를 원했는데 막상 연결이 안 되니 오히려 불안해졌다. 휴가지에서 돌아와 집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와이파이가 잘 되는지 확인한 일이었다. 와이파이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집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빈둥거리는 따뜻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김치에 라면을 먹어도 익숙한 이 맛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껴졌다. 보통은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아쉽고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번에는 집에서 느끼는 익숙한 소중함이 더욱 컸다. 감기가 낫고 난 후의 그 즐거움과 같은 느낌이었다.
여행을 가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신선해서 좋고 돌아와서는 일상에서 누리는 편안함이 좋다. 일상의 소중함이 낯선 곳에서의 색다른 경험 후에 더욱 크게 다가온다. 연말에 여행을 다녀오고 심한 감기에서 회복된 후 올해의 계획은 ‘작지만 가까이 있는 것에 즐겁게 감사하자’로 정했다.
항상 거창한 계획, 대단한 모습으로 변신한 나를 그리며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 잘 이뤄지지도 않고 허망할 때가 많았다. 오히려 작은 곳에서 이렇게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정말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그 전해에 내가 해왔던 일들을 돌아보며 그래도 열심히 했다고 다독거리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작게 결심을 해본다.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 위안이나 변명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과 작은 것에서도 의미와 소중함을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필요한 시기이다.
요즘 TV나 신문에서 스몰 럭셔리(small luxury)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불황인 이 때에 비싼 명품이나 거창한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부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소비를 해 만족을 느끼는 트렌드를 말한다. 작지만 나에게 의미와 높은 만족을 줄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찾는 것이다. 비싼 자동차는 사지 못해도 취미와 건강을 위한 자전거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고, 프렌치 레스토랑의 유명 셰프가 만든 코스요리는 아니어도 작은 케익이나 초콜릿에서 미각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작게 사치를 누리는 것은 단순한 대리만족이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물건이 됐건, 경험이 됐건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고 자기만의 만족을 찾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몰 럭셔리란 단어가 과시를 위한 된장기질이 아니라 자기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소신으로 보인다.
가치와 만족을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찾는 것도 행복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준비도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2015년에는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더욱 키우고 싶다. 성경에 나오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새기며, 작지만 나에게 소중한 것, 내가 의미를 줄 수 있는 것, 바로 가까이 있지만 느끼지 못했던 소중함을 찾는 한 해로 보내려고 한다.
박은진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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